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com/live/Xy_C1VVjN0M
누가복음
17장 11-12절을 보면 [눅
17:11-12]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Now on his way to Jerusalem, Jesus traveled along the
border between Samaria and Galilee. As he was going into a village, ten men who
had leprosy met him. They stood at a distance 이
말씀은 열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고침을 받은 내용입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고침을
받으며 치료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병 고침의 사건들을 대할 때마다 놀라움과 신비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반응이 당연한 것은 이것이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본문을 대할 때 조심하여야 하는 것은 그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병 고침의 기적은 그 초점이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을 행하신 분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자꾸 혼동하며 잘못 이해함으로 잘못된 행동을
일으키게 합니다.
예전에
어느 기도원에 갔을 때 경험한 일입니다. 한국의 기도원은 많은 병자들이 몰려 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설교가 병 고침이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말씀들이 주로 선포됩니다. 복음서를 보면 병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짖는 경우들이 들이 있습니다. 그 장면을 말씀하시며 왜 병이 안 낫는가 하면 부르짖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부르짖는
것이 성경에 나타난 병자들의 간절함이지 그것이 병을 낫기 위한 원리로써 주어진 적은 없습니다. 또한
문둥병에 걸린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하면서 요단강 물에 일곱번 그 몸을 담그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낳았다며 하찮은 일이라도 시키면 순종해야 병이
낫는 다고 말합니다. 왜 이런 말씀들을 하는가 하면 병을 낫는 것과 병자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모든 본문이 그렇지 않지만 많은 경우 병자의 행위 보다는 치료하시는 분이신 예수님께 초점이 있음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갈릴리와 사마리아 경계를 따라 이동하십니다. 1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한 마음에 들어가셨을 때 열명의 문둥병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12절을 자세히 살피면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나타납니다.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가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을 이렇게 말한 의도는 문둥병자들에게 새로운 무엇인가가 일어날 것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도 그렇지만 나병에 걸린 다는 것은 하늘에서 내린 병 즉 천형으로 알고 있으며 저주받아 걸린 병으로 이해하는
상황에서 이런 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을 어떤 기대감과 무엇인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리라는 암시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을 만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새롭게 된다는 것이고 완전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난 다는 것은 어떤 이에게는 일생 일대의 기적이며 삶의 전환이며 죽었다가 살아난 경험입니다.
이들 문둥병자들이 이런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열명의 문둥병자들은 멀리 서있었다고 합니다. 멀리라는 의미는 거리를 둔 상태를 의미합니다. 왜 문둥병자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고 멀찍이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던 것일까요? 그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이유는 그들 안에 있는 무엇 즉 그들의 질병 때문입니다. 나병은 레위기 13장에서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병입니다. 그래서 격리 되어야 합니다. 부정하게 한다는 것은 병을 옮기는 것
보다는 종교적으로 부정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는 것이 금지된 것입니다. 모두를 부정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이들과 예수님
사이를 표현하는 멀리 서서 라는 말은 눈에 보이는 실제적인 거리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 질병을
가진 자들은 늘 거리의 개념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분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우리는 세리의 기도를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3절을
보면 [눅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But the tax collector stood at a
distance. He would not even look up to heaven, but beat his breast and said,
'God, have mercy on me, a sinner.'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
기도할 때에 멀리 서서 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멀리 서서 라는 말이 실제적 가시적 거리를 의미하지만
그의 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진 듯한 자신의 삶을 나타내며 탄식하는 의미입니다. 문둥병자들에게서 나타난 거리도 이와 같습니다. 이들은 거리를 두고
사는 자들 즉 분리된 자들입니다. 사람들에게서 분리된 자들이고 하나님께도 분리된 자들입니다. 이것이 멀리 서서란 단어 속에 나타난 의미입니다.
질병으로
인해 사람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자들이 그 다음에 하는 행동은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눅 17: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and called out in a loud voice, "Jesus, Master, have pity on us!" 이들은 소리를 들어 올렸습니다. 그 소리는 예수님을 부르는 소리였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선생님이란 가르치는 자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주인 혹은 임명 된 자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갈릴리
바다에서 폭풍으로 인해 죽을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를 때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르며 이들이 말한 것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짧은 구절이지만 그들의 모든 상황과 어려움과 고통을 다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 말은 병에서 벗어나고 싶은 간절함입니다. 이들에게 물질적 부유는 의미 없습니다. 좋은 의복도 소용없습니다. 이들에게는 무엇을 먹는가 마시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오직 필요한 것은 병 나음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은혜이고 최고의 선물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최고의 선물과 최고의 은혜는 구원입니다. 이들이
분리라는 질병에서 벗어나 거리를 좁히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 소망이듯이 하나님과 분리되었던 우리의 삶의 최대의 소망은 그분과의 연합이며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눅
17: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When he saw them, he said, "Go, show yourselves to the
priests." And as they went, they were cleansed. 이런 부르짖음을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두 개의 명령을 하시는데 첫째가 가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보이라 라는 말입니다. 이 두 명령을 내리십니다. 사실 이 두 명령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는 받을 수 없는 명령입니다.
아무것도 해주지 않고 그냥 가라 그리고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합니다. 제사장에게 보이는 이유는
율법에 병이 나았음을 확인하는 사람이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누구신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갈수 없습니다. 또한 보일 수 없습니다. 만약 보일 때 병이
낫지 않았으면 무슨 망신입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다른 아무 조치도 없으시고 가라 보이라 라고만 말씀하신
다는 것입니다. 이 어려운 말씀을 듣고 그들이 갑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사건이 빠르게 전개되는 것은 이러한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이 명령을
듣고 갑니다.
15절을 보면 [눅
17: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One of them, when he saw he was healed, came back, praising God in a loud
voice. 이들이 가는 도중에 한 사람이 자신이 나은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나았다는 말이 수동형으로 나아진 것을 본 것입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가는 도중에 자신의 병이 나아진 것을 보았습니다. 본문은 이것을 중요하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병을 나음 받은 후의 그의 행위입니다. 그가 큰
소리를 지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큰 이라는 단어는 메가 입니다. 엄청나게
크게 소리를 질렀다는 것입니다. 먼저의 예수님을 부르던 그 소리 지름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엄청나게 큰 소리를 지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이
모습을 직역하면 이런 모습니다.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이 자신의 나아진 것을 보았고 그는 큰 소리와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병이 나은 사람이 한번 놀라워서 큰 소리를 지르고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돌아오는 내내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으로 쳐다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가득하기 때문에 다른 것이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16절을 보면 [눅
17: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He threw
himself at Jesus' feet and thanked him-and he was a Samaritan. 그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라고 표현하지만 원문은 좀더 강하게 표현합니다.
그가 그의 얼굴을 그의 발 아래에 떨어뜨립니다. 이것은 천천히 진행된 행동이 아니라 이
사람이 급히 와서 오자 마자 예수님의 발로 마치 다이빙 하듯 달려들어 얼굴을 대는 행위입니다. 왜입니까?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감사해서 그렇습니다. 자신의 병이 나으리라고는 그의 평생에 기대해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낫은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질병에서 해방이 된 것입니다. 오랜 질병의 질고에서 해방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렇기에 감사한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이 나면 예수님께서 열명의 문둥병 혼자들을 고친 사건으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여기에 살이 더 붙어 있습니다. 이제 부터가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머지 아홉을 찾고 계시다는 것이니다. 17절에 말씀하십니다. [눅
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Jesus asked, "Were not all ten
cleansed? Where are the other nine?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이 나머지 아홉을 찾는 다는 것은 그들이 마땅히 돌아왔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아홉도 병이 나은 것에 대하여 충분히 기뻐하고 감사했을 것인데 굳이 귀찮게 예수님께 나와서 이렇게 말해야 되는가 감사가 꼭 말해야 되는 것인가
마음에 있으면 되는 것이지 라고 말입니다. 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의미는 그것 이상입니다. 18절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눅 17: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Has no one returned to give praise to
God except this foreigner?"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이 중요합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이라는 말에서 이 사람이 사마리아인 이기에 유대인들을 혼내고 사마리아인을 칭찬하기 위해서
한 말씀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 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돌아오려는 생각을 가져진 자가 없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은 병이 낫고 나서 그들의 마음 안에 꼭 생각 되어져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마음의 생각들이 그들 안에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열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사장에게로 가고 있습니다. 가는 중에 한 사람이 소리를 지릅니다. 병이 낫은 것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그의 머리 속에 가슴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생각이 사로 잡았기 때문입니다. 병이 나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하신 하나님이 너무나 놀라운 분이시며 그분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아홉은 어떻습니까? 병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한 것은 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질병에서
해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병을 낫게 한 분은 그들의 마음에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이제 병이 나아서 집으로 돌아가고 자신의 잃어 버린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들의 생각 속에 있을
뿐입니다.
18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는 무엇을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나아진 병인가 아니면 낫게 하신 하나님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오지 않은 9명의 나병환자들은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말씀대로 제사장에게 가는 정도의 일시적이고 기능적 믿음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나의 삶의 회복이었을 뿐, 은혜를 주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것까지가 그들의 복입니다. 이들을 향한 안타까움은 이들은 비록
육신적인 치료를 받고 회복되어 다시 가정으로 사회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이들의 인생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둥병자에게 더욱 필요한 것이 병을 고치는 것 이외에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를 물을 수 있습니다. 바로 영혼의 구원입니다.
이 땅에서 병에서 나음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영혼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다는 것입니다. 19절을 보면 [눅 17: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Then he said to him, "Rise and go; your faith has
made you well."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나머지 아홉과 전혀 다른 가장 큰 복을 받는 일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여기에 사용된 구원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소조 입니다. 그 의미는 구원하다, 구출하다, 안전하게 하다, 건지다 라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육체적 위험이나 질병에서 벗어나는 일차적 의미로도 쓰이지만, 누가복음 및 바울 서신에서는 영혼의 죄와 사망,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얻는 영원한 구원을 가리키는 핵심 구원론적 용어로 주로 사용됩니다.
문법적으로
이 동사는 완료 시제입니다. 이는 과거에 완료된 행동의 결과가 현재까지 지속되어 그 효력을 미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즉, 단순히 방금 네 병이 나았다라는 일시적
시점이 아니라, 네가 구원을 받은 상태가 되어 그 영적 효력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영혼의 구원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누가는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하여 이 의미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다시 누가복음 17장 14절을 보면 [눅 17: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When he saw them, he said,
"Go, show yourselves to the priests." And as they went, they were
cleansed. 여기서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구원이라는
병을 고침이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깨끗함이라는 카다리조로, 나병 등 피부병이 위생적으로 또한 율법적으로 깨끗해졌다는 뜻의 외적 치유 용어입니다.
14절에서
아홉 유대인 나병환자 포함 열 명 모두가 받은 것은 카다리조(깨끗해짐)입니다. 그러나 19절에서 예수님은 구원이라는 소조라는 단어를 이 사람에게만
사용하십니다. 그 이유는 돌아온 사마리아인은 이미 돌아오기 전에 나은 것입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가 깨끗해진 시점은 제사장들에게 가다가입니다. 즉, 사마리아인이 예수님께 다시 돌아와 발 앞에 엎드리기 이전에 이미 육체적 나병은 완치된 상태였습니다. 만약 19절의 너를 구원하였다가 단순한 병 고침을 뜻한다면, 이미 나아서 돌아온 사람에게 예수님이 새삼스럽게 네 병이 나았다고 재선언하시는 중복된 의미가 됩니다. 예수님은 이미 일어난 육적 치유를 확인해 주신 것이 아니라, 돌아와
경배한 그에게 임한 영적 구원의 상태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둘째로는
이는 돌아오지 않은 9명과의 명확한 영적 차별성을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아홉 명의 유대인 나병환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에게 가다가 육체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육신의 치유라는 측면만 본다면 9명이나 돌아온 1명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17~18절에서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이 이방인 외에는 없느냐라고 안타까워하시며, 오직 돌아온 사마리아인에게만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언하십니다. 만약 이것이 병의 치유라면 돌아가지 않은 9명도 똑같이 구원받은
것이 되어 예수님의 질문인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와 19절의
특별한 선포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물질적 부유함를 주시면 그것을 붙잡고 의지하느라 하나님을 잊어 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 더 중요하고 붙잡아야 할 대상이냐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 환경의 개선, 육체의 건강 등 하나님이 주시는 복(선물)에만 마음에 빼앗기지 말고, 그
복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갈망해야 합니다. 육신의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만족하는 아홉 명의 종교인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지, 아니면 그리스도 앞에 엎드려 영혼의 구원을 누리는 한 사람의 참된 제자인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삶 전체를 감사의 예배로 드리십시오: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반응 이어야 합니다. 감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의 가장 분명한
표증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