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9:21-25
무리는 내 말을 들으며 나의 가르치기를 잠잠히 기다리다가 내가 말한 후에 그들이 말을 내지 못하였었나니 나의 말이 그들에게 이슬 같이 됨이니라 그들이 나 바라기를 비 같이 하였으며 입을 벌리기를 늦은 비 기다리듯 하였으므로 그들이 의지 없을 때에 내가 함소하여 동정하면 그들이 나의 얼굴 빛을 무색하게 아니하였었느니라 내가 그들의 길을 택하고 으뜸으로 앉았었나니 왕이 군중에 거함도 같았고 애곡하는 자를 위로하는 사람도 같았었느니라.
어떤 사물, 사건 ,혹은 현상에 대한 인간의 인식에는 세단계가 있다고 한다.
1. 눈에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인식하는 단계
2.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는 단계
3.보이는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되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이나 얻는 것을 자기 삶속에서 적용하고 실천하는 단계이다.
이 세가지 가운데 세번째 단계가 가장 이상적이고 이 단계의 삶들은
날로 그 삶이 바람직하고 긍정적으로 개선되고 변화 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건이나 상황을 보고 그사람을 그대로 판단 한다면 그사람은 첫번째 단계 사람이고 같은 사건을 보면서도 그 사람이 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가를 생각하는 사람은 두번째 단계이며 세번째 사람은 그런일을 볼때마다 남의 삶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들을 통해 내 삶을 어떻게 볼 것인지를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더욱 성숙시키는 사람이라고 한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현실 상황만으로 욥을 판단하고 있지만 욥은 그러할지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말씀 묵상을 하면서 성경 전체와 그날의 말씀 묵상 내용과의 연관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말씀을 읽고 있지만 욥기는 그날의 말씀과 내일의 말씀이 서로 상반되어 괴리감을 느낄때도 있어 전체적인 맥락에서 길을 잃을 때가 많다. 그래서 욥기는 묵상 하기에 쉽지 않은 것 같다. 과거와 현실이 너무나도 다른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보는 욥의 심정이 바로 이런 괴리감인 것은 아닐까? 그러나 늘 그 어떤 말이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며 말하고 있는 욥의 믿음은 대단한 믿음이 아닐 수 없다.
욥은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가 되어주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도움이 되어주었고 불의한 자들에 대하여 싸워 주었고 모든 이들이 그에게 희망을 걸었으며 선망의 대상이었던 욥이었다. 그가 그의 지난 날을 회상하며 위로를 삼으려 하지만 비난과 질책과 조롱에 둘려 쌓여 있는 현실로 돌아와 그 누구도 그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 고독속에 배신감과 좌절을 맛보며 최악의 고통을 겪고있다.차라리 무인도에 있었더라면 사람들로 인한 고통은 없었겠지 하는 심정일 것이다.
그런 욥의 모습을 보며 영화로운 곳을 떠나 이 초라하고 덤불과 엉겅퀴가 덮힌 땅으로 내려오신 예수님을 생각해 본다. 본래 하나님이셨건만 우리를 죄가운데서 건지시기 위하여 친히 내려오신 예수님. 그분은 영화롭던 그 자리에서 초라하기 그지 없는 자리로 사람들의 대접을 받기 보다는 오히려 외면을 당하셨고 인정 받기 보다는 유대인의 음모와 모략속에서 죽음의 위험을 무릎쓰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시며 저는 자와 눈먼자들을 고치시고 소외되고 천대 받는 자들과 함께 계셨던 주님이신 예수님이셨다. 육체의 고통보다 더한 제자들의 배신으로 인한 고독감까지 맛보시며 죽어가셨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 욥의 마음을 이해 하시지 않으셨을까? 시공을 초월하신 하나님이셨던 예수님은 벌써 오래전부터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의 그 모든 일들을 보시며 욥을 생각하고 이해 하셨듯이 지금 척박한 이 땅에서의 삶을 사는 우리 인간들을 보시며 내가 너를 이해하고 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실까? 비록 삶이 고통스럽고 그 고통을 잠시라도 잊기위해 지난날의 행복했던 기억들을 되돌아 보며 위로를 삼고 있는 힘든 그런 상황일지라도 오직 우리의 힘이 되시고 위로자가 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서 우리의 아픔과 슬픔의 무거운 짐들을 내려 놓아야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