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com/live/rje8rl4U5_0
우리는 지난 시간에 지옥에 대하여 살펴보며 지옥이라는 것이 현대인들에게 주는 의미와 생각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지옥이라는 불쾌하게 하는 것이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꺼리는 것이 되는 이유는 지옥이라는 것이 누군가에 대한
심판이고 잔혹한 벌이며 끔찍한 저주이기 때문에 지옥에 대하여 현대인들은 지옥을 오래된 신화로 이해하거나 혹은 희화하여 그 두려움과 공포감을 지우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지옥에 대하여 분명하게 이야기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에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써의 죽음은 지옥이냐 아니냐를 결정짓는 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타인의 문제가 아닌
나 개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옥에 대하여 생각 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좀 살펴봅시다. 히브리서 6장 1절과 2절 말씀을
보면 [히 6:1-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Therefore let us move beyond the elementary teachings about Christ and be taken
forward to maturity, not laying again the foundation of repentance from acts
that lead to death, and of faith in God, instruction about cleansing rites, the
laying on of hands,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nd eternal judgment. 히브리서
기자는 유대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도를 다른
번역본들에서는 교리로 번역을 했습니다. 교리라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기 위하여 조직화한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의 그리스도의 도 즉 교리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초보적인 것과 성숙한 것으로 나뉘어 진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초보란 이제 막 가르침에 입문하여 배우기 시작하는 단계를 의미함으로 당시에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고
신자가된 이들을 위하여 별도의 기초적인 교육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말씀을 교육하고 가르침으로
교리에 대한 훈련으로 신자들은 자신들이 믿는 것이 무엇인지와 어떻게 더 성숙한 신자로 나아가는 길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신자가 더 완전한 데로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버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버린 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기초가 되는 것을 이제 없애버리거나 지워버린 다는 말이 아니라 떠난 다는 의미입니다. 그 초보의 자리에서 떠나야 완전한 데로 옮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완전하기 위하여 떠나야 할 기초적인 교리들은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것, 하나님께 대한 신앙, 세례들, 안수,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입니다. 여기서 안수는 당시에 안수를 성령을 받는 도구로 인식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 안수 자체가 기계적으로 성령을 받는 수단이 아님을 가리키며, 안수는
임직의 방식으로 주어진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당시의 새로 입교한 신자들에게 교육되었던
것들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교훈은 이미 받았기 때문에 이제 다시 이것에 머물지 말고 더욱 완전한데
나아가라고 합니다. 여기서 완전한 데라는 것은 신앙의 성숙함을 의미합니다. 신앙이 기초에 머물며 이 기초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 신앙이 성숙하지 못한 미성숙의 상태로 남겨질 수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이러한 교리적 교육과 말씀의 훈련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신앙이
기초에 머무르게 될 뿐만 아니라 성숙함을 찾아 볼 수 없게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신앙의 기초 교육으로써 가르쳐진 것들 가운데
영원한 심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지옥에 관련된 교육이 있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지옥에 대한 교리는 과거의 신자들에게 기초 교육으로써 이해되어야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먼저 우리는 지옥이라는 것이 어떠한 고통에 대한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지옥이라는 인간들이 서로에게 주는 고통이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는 인간들 간에 주고 받는 고통을 지옥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지옥은 현실에서 맛보거나 경험하는 괴로움이나 힘듬이나 고통에 대한 실체가 없는 상황들이나 환경등의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지옥을 실재 장소로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30절을 보면 [마 5: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And if your right
hand causes you to stumble, cut it off and throw it away. It is better for you
to lose one part of your body than for your whole body to go into hell.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의 지체 가운데 하나가 범죄하게 하면 찍어 버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더욱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온몸이 지옥에 던지 운다고 합니다. 던지 운다는 말에서 우리는 온 몸이 가게 되는 어떠한 장소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구절에서 지옥이라는 말은 게헨나 라는 단어입니다. 게헨나는 예루살렘 외곽의 힌놈의 골짜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게헨나
라는 말이 왜 지옥에 대한 상징적인 단어가 되었는가 하면 이 장소는 역사적으로 암몬의 신 몰렉에게 희생 제물로 아이들을 불에 태워 바쳤던 장소입니다. 열왕기하 23장 10절을
보면 [왕하 23:10] 왕이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의 도벳을 더럽게 하여 어떤 사람도 몰록에게 드리기 위하여 자기의 자녀를
불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He desecrated Topheth, which was in the Valley
of Ben Hinnom, so no one could use it to sacrifice their son or daughter in the
fire to Molek. 요시야 왕이 힌놈의
아들 골짜기의 도벳을 더럽게 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에 힌놈의 아들 이라는 말이 게헨나의 어원이 되는
말입니다. 여기를 더럽게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가공스런 희생 제사가 요시야 왕에 의해 폐지된 이후 이곳을 혐오하여 이곳을 모든 종류의 쓰레기뿐만 아니라 심지어 죽은 동물과 처형되었으나 매장되지
아니한 범죄자들의 시체로 더럽혀지게 되었고 부패물에 오염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불을 놓아 이곳에는 끊임없이 불과 연기, 악취, 벌레등의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한 곳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게헨나 라는 말은 지옥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단어가 된 것입니다. 지옥은 하나님이 지으신 실재적 장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롯 유다의
경우에도 제 곳으로 갔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사도행전 1장 25절을
보면 [행 1: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to take over this apostolic ministry, which Judas left to
go where he belongs." 여기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이라는 장소적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장소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경은 지옥이 형벌의 장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옥이 형벌을 살펴보면 그것이 얼마나 끔찍하며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의 장소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12절을
보면 [마 8: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But the subjects of the kingdom will be thrown outside, into the
darkness, where there will be weeping and gnashing of teeth."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간다고 합니다. 또한 마가복음 9:48절에서는 [막 9: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where "'the worms that eat them do not die, and the fire is
not quenched.'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지옥이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다는 표현을 통하여 지옥이 인간에게 더할 수 없는 고통의 장소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계시록 14장 10절과 11절은 지옥이 얼마나 두려움과 공포의 장소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계시록 14장 10-11절을 보면 [계 14:10-11]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자들에 대하여 요한이 묘사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신다고 합니다. 이 포도주는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 입니다. 섞인 것이 없다는 것은 원액 그대로 라는 것입니다. 포도주의 원액은 곧바로 취하게 하며 취하여 비틀거리고 토하며 쓰러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진노의 포도주가 진노의 잔에 담겨 마시게 함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로 비틀거리며 쓰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당하는 일은 천사들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습니다. 여기서 유황은 화산 퇴적물 속에서 발견되는 아스팔트의 한 종류로 뜨거운 열과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만이 아니라 11절에서는 이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밤낮 쉼을 얻지 못합니다. 이것이 누구에게 주어지는 고난입니까?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입니다. 이들은 요한 계시록에서 성도들을 죽인자들이고 짐승을
경배한 자들이고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자들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가공할 만큼 두렵고 공포스럽게 말씀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칼빈은 '성령은 그런 표현들을 사용해서 우리의 모든 감각을 끔찍함으로 떨게 하고자 의도하신 것이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지옥에 대하여 끔직하고 너무나 공포스러울 만큼 사실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두렵고 떨림으로 신자됨을 온전히 이루라는 역설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지옥은 절대로 가지 말아야 할 장소이며 피해야 할 장소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군가 죄를 짓게 되면 감옥에 갑니다. 이 장소는 세상이
주는 형벌의 장소입니다. 세상이 주는 형벌의 장소는 단순히 형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수감자의 사회
복귀를 위한 교정의 목적이 주된 것입니다. 또한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격리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옥이란 형벌의 장소는 세상의 형벌의 장소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장소는 교정을 위한 장소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이곳은
영원한 형벌의 장소입니다. 한번 심판이 시행되면 다시 번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곳은 슬피 울며 이를 갈며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장소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는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라는 시간이 주어진 때에 우리는 복음을 들어야 하며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옥은 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죽음을 안겨준 사람들만을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히틀러나 김일성이나 희대의 살인마나 인면수심의 사람들이 가는 곳이 맞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데살로니가 후서 1장 8절을 보면 [살후 1: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He will punish those who do not know God and
do not obey the gospel of our Lord Jesus.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세상에서 착하게 살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도덕적 윤리적 삶을 살았다고 한다 해도 하나님을 모른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형벌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을 알고 있으며 예수의 복음에 순종하며 산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에서 벗어난 자입니다. 그렇기에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에서 시인들이 구원의 즐거움에 대하여 노래하며 찬양하는 것이 어떠한 연유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구원의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며 그것을 노래하며 찬양하는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두려운 것인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왜 수많은 질병으로 고난을 당하면서도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어디서 불평과 원망이 아닌 찬양이 흘러나오게 됩니까?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나를 건져 주신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입니다. 사업이 망하고 인생에 험난한 파도가 쉴새 없이 몰아쳐도 왜 감사할 수 있습니까? 인생에서 당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원수가 아닌 그분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독일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죽음의 사신이 온다는 것보다 더
정확한 사실은 없고, 그가 언제 오는가 하는 것보다 더 부정확한 것은 없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 서실 준비가 되셨습니까? 그분의 심판에서 벗어나셨습니까? 준비된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주님 만날 날을
고대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런 자들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