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영상https://youtube.com/live/pstKdaJH6yk
지옥은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불신자들이 아닙니다. 성경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자들 가운데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지옥에 대한 교리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기에
이들의 주장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죽으면 그 영혼이 멸절하여 사라져 버리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영혼 멸절설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이 안식교입니다. 이들이
지옥에 대하여 강한 부정을 하며 성경의 구절들을 인용하여 지옥이 없다고 증명하며 설득하려고 합니다. 이들의
논리의 근거는 지옥이란 너무 고통스러운 장소인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런 장소를 만들어 인간들로 하여금 고통을 당하도록 의도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지옥에 대한 논리들이 헬라 철학에서 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지옥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을 일부러 성경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해석함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지옥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도록 하는 마귀의 도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에 대하여 대응할 가치도 없지만 여러분들의 신앙적 유익을
위해서 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이들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계시록 20장 9절 말씀입니다. 계시록
20장 9절을 보면 [계 20:9]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They marched across the
breadth of the earth and surrounded the camp of God's people, the city he
loves. But fire came down from heaven and devoured them. 라고 말씀하는 것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태워버리고 라고 합니다. 옛 개역 한글 성경에서는 소멸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이 말씀을
인용합니다. 안식교는 소멸이라는 단어에 주목하며 불태워 없애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혼이 멸절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계시록 20장 12절과 보면 [계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And I saw the dead, great and small, standing
before the throne, and books were opened. Another book was opened, which is the
book of life. The dead were judged according to what they had done as recorded
in the books.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들이 펴졌으니 이 책은 생명책입니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합니다. 다음절인 13절을 보면 [계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The sea gave up the dead that were in it, and death and
Hades gave up the dead that were in them, and each person was judged according
to what they had done.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합니다.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15절을 보면
[계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Anyone whose name was not found written in the book of life was thrown into the
lake of fire.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진다고 합니다. 이
불못은 영혼이 멸절되지 않는다는 증거이며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은 사라지지 않고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9절이 태워버림 즉 소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고
해서 영혼이 멸절된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멸이라는 단어도 태워져서 없어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삼키운다는 뜻입니다. 한글 성경은 멸절의
의미로 소멸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불의 심판이 가져오는 재앙과 힘의 상실의 의미로 소멸이라는
의역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는 자들은 소멸이라는 단어를 멸절로 밖에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계시록 14장 11절을 가지고 설명합니다. 계시록 14장 11절을
보면 [계 14: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And the smoke of their torment will rise
for ever and ever. There will be no rest day or night for those who worship the
beast and its image, or for anyone who receives the mark of its name." 여기서
세세토록이라는 말이 영원히 라는 뜻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 근거로 구약에서 누군가 영원히 종이 되려고
할 때에 출애굽기 21장 6절을 보면 [출
21:6]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을
것이라 그는 종신토록 그 상전을 섬기리라 6 then his master must take him before
the judges. He shall take him to the door or the doorpost and pierce his ear
with an awl. Then he will be his servant for life. 문설주에서
송곳으로 귀를 뚫습니다. 그리고 영영히 상전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영히 라는 말은 당연히 영원히 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의 생애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구절에서 영영히 라는 말이 일정한 생애를 표현한다고 해서 성경의 모든 영영히라는 말이 생애의 일정기간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웃기는 것입니다. 특히 계22장 5절을 보면 [계 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There will be no more
night. They will not need the light of a lamp or the light of the sun, for the
Lord God will give them light. And they will reign for ever and ever.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세세토록이라는 말 즉 영원히 라는 의미가 한 생애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세세토록은 영원히라는 뜻입니다. 영원히라는 말이 문맥과 문장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생각해야지 한 부분에 기록된 것만을 가지고 자신의 입맛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안식교 같은 이단들이 하는 짓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의 주장은 터무니 없는 것이며 영혼 멸절이나 지옥은 없다는
식의 주장은 사탄의 거짓된 전략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영혼이 멸절된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합니까? 죽으면 끝이 나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죽으면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에 성경은 그 경고를 끊임없이 우리에게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진노에 따른 심판과 지옥에 대한 교리들을 부정하며 변질하고자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잘못된 견해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전제를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전제가 아닌 인간적인 사고와 체계 속에서 만들어낸 사랑의 개념을 성경에 적용해서 발생하는 오류입니다. 이것이 인본주의적 신앙입니다. 인본주의적 사상 속에서 사랑이라는
개념은 인간 중심적이 됩니다. 인간이 중심이 된 사랑에는 심판이나 저주나 고통이나 진노나 지옥이라는
개념은 더 이상 사랑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에서 사랑은 구속이 아니어야 합니다. 사랑은 원하는 것을
하는 무한한 자유이어야 합니다. 어떠한 제한이나 간섭도 없어야 합니다.
이것이 인본주의적 사랑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러한 사랑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게 됩니다. 어떻게 신이 연약한 인간을 향해 증오하며 지옥이라는 엄청난 심판을 할
수 있는가? 성경에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그 사랑과 반대인 심판과 멸망을 인생들에게 허락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분노를 멈추고
연약한 인간들에게 한없는 자비를 베풀며 관용과 용서를 베풀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진노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견해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와 생각은 불신자들만이 아니라 은연중에
신자들 안에도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로 표현하지 않지만 불만을 가지고 이런 교리를 가르치지 말 것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정말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심판과 멸망에 대하여 그리고 그 장소인 지옥에 대하여 전혀 관계없는
사랑인가에 대하여 성경을 통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요한 1서 4장 8절을 보면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Whoever does not love does not know
God, because God is love. 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랍니다. 이 말씀은 현재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다면 그것은 사랑의 부족이나
성격이나 기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을 아는 자들의
삶의 형태이며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인 앎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 지식적인 앎이 아닌 이유는 모든 지식적인 앎이 순종이라는 행동양식을 만들어
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은 모르는 것보다 더욱 나은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지식이 행동을 만들어내지는 못합니다. 행동을 만들어내는 앎 곧 지식은 경험을
통해 확인과 확신을 가지게 되어 의지적 작용이 함께 이루어질 대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배워도
그것이 경험됨으로 확인과 확신되고 의지적 결단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그 말씀에 대한 순종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변화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말씀에 의지해서 살지 않음으로 말씀에 대한 확신 즉
믿음이 없고 또한 그러한 상태에서 어떠한 의지적 결단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변화되지
않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요한이 하나님을 아는 자가 사랑이라는 순종적 행동을 하게 되는 이유를
말하는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는 말씀을 오해합니다. 요한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고 말씀한 것은 이유입니다. 신자가
누군가를 사랑하며 섬기는 것이 어디에서 근거한 것인가? 그는 왜 타인을 사랑하며 희생하며 헌신하며 섬기는가? 하는 것에 대한 답으로 제시한 것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입니다. 즉
예외 없이 모든 신자의 사랑의 근거는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의 근원이 있는데 그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말이 본문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왜냐하면 이라는 말이 이 문구의 앞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어떠한 사랑을 경험하고
체험하고 믿음으로 확신에 이르러 그러한 사랑을 실천하며 사랑의 순종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4장 9절입니다.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This is how God showed his love among us: He sent his one and only Son into the
world that we might live through him.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타났다는 말은 알려지지 않은 것을 명백하고 분명하게 알려지게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명확하지 않고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호하여 의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알게 되었는데 바로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어 그를 통하여 우리를 살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분명히 알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무엇이 하나님의 사랑이십니까? 그를 통하여 우리가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게 되었다는 말은 우리는 그가 없이는 살 수 없었던 자라는 의미입니다. 10절은 이 부분을 좀더 정확하게 말씀해 줍니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This is love: not that we loved God, but that he loved us and sent
his Son as an atoning sacrifice for our sins. 요한은 사랑이 여기 있다고 합니다 여기 있다는
말은 이것이 사랑이다 라고 표현될 수 있습니다.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냈다고 합니다. 요한이 말하는
화목제란 말은 값을 지불하는 속죄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단순히 화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대가로 지불해야 되는 빚짐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자들은 그에 대한 죄의 값을 지불해야
하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그 값을 지불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왜
일어났는가? 하나님은 왜 자신의 독생자를 인간들의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하여 가라고 명하시고 보내신 것인가? 라는 질문에 요한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 이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죄를 덮어두며 악을 내버려 두며 옳지 않음을 방조하는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본주의적 사랑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건 제한되지 않으며 간섭되지
않는 것이며 무엇에나 구속되지 않으며 속박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에 책임지지 않으며 어떠한
행동에도 비난이나 책망이나 그에 따른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 이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이나 지옥에 대하여 말씀하시거나 그렇게 하시면 안 되는 이유가 그렇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눈감아 주며 악을 심판하지 않으며 범죄에 대하여 침묵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공의를 행하시는 것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의
죄에 대하여 악에 대하여 침묵하시는 것이 사랑이고 생각하십니까? 흉악한 범죄자를 눈감아 주는 것이 사회가
주는 사랑입니까? 이 말에 누구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죄에 대하여 악에 대하여 관용하며 묻지 않고 덮어두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용서와 자비가 그 내용이지만 죄와 악에 대하여 만큼은 그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녀의 죄를 그냥 덮는 것은 자녀의 인생을 망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악을 방치하는 것은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인간들
안에서의 사랑의 의미가 이렇다면 어찌 하나님께 악을 방치하라 하며 죄를 허물하지 말라고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거룩하시다는
말은 죄를 용납하거나 묵인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공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선을 행한 자들에게는 선함으로 악을 행한 자들에게는 악에 대한 심판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심판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공의로움을 포기하며 거룩하지 말라는 요구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심판하신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자기 아들을 제물로 죽게 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당신의
사랑이 부족하다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칠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 말씀처럼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있을 수 있지만 죄인을 위하여 죽는 자는 없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원수 된 죄인들입니다. 자기 아들을 버린 분을 누가
감히 사랑이 부족하며 없다고 논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그 사랑을 모르기 때문이며 그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이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시며 아무렇게나 살아도 하나님은 벌하지 않으실 것이며 어떠한 심판도 없을 것이며 지옥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위배되는 것이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상이나 가르침은 모두 사탄의 전략이며 미혹케 하는 영의 계략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심판하지 않으시려고 악에 대하여 그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시려고 하셨다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에게 인간들의 죄를 짊어지고 속죄의 제물로 죽게 하신 것은 죄에 대하여 악에 대하여 분명히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공포하신 것입니다. 행여 하나님을 잘못 알지 마십시오. 내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겠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나의 죄를 눈감아 주시겠지, 나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겠지,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분명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아직 이 땅에 남아 있을 때에 하나님께 나아오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며 살아야 합니다. 참된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