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com/live/qcFrxfkuVk8
오늘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의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믿는 자에게
있어서 구원의 징표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상징이며 우리의 사죄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에
대하여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의외로 잘 모르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는 별일 아닌 것을 너무 크게 확대하고 과장한 것이 십자가라고도 생각합니다. 이런 질문들을 종종 하시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지 않습니까? 또한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를 원하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에게 너희 죄를 사하노라 라고 단순하게 말씀하시면 될 텐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이런 번거롭고 귀찮고 잔인하기까지 한 십자가라는 방법을 통하여 죄를 사하실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쉽고 간편한 방법대신에 피가 튀고 살이 찢어지는 형벌인
십자가를 속죄의 장소로 삼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십자가의 필요성에 대하여 무엇이 십자가를 요구하며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것인지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 가운데서도 이런 질문을 하는 분이 계시다면 본인의 구원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 보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은 구원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구원 사건의 핵심이 십자가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대한 중요성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1절과
2절에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고전
2: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And so it was
with me, brothers and sisters. When I came to you, I did not come with
eloquence or human wisdom as I proclaimed to you the testimony about God. For I
resolved to know nothing while I was with you except Jesus Christ and him
crucified. 바울이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과 듣기
아름다운 말을 하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지혜의 아름다운
말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전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인 것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십자가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면 그 십자가에서
이룬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본문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 복음 19장 28절을
보면 [요 19: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Later, knowing that everything had now been finished, and
so that Scripture would be fulfilled, Jesus said, "I am thirsty." 이
후에 라고 말합니다. 어떤 일 후에 인가하면 예수님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7개의 말씀 가운데 세 번째 말씀을 하신 이후 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하신 7개의 말씀을 살펴보면 첫 번째로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라는 말씀으로 요한에게 마리아를 맡기시는 말씀입니다. 네 번째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는 말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말씀입니다. 다섯 번째는 내가 목마르다라는 말씀이고 여섯 번째는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며 일곱 번째는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 번째 말씀 후에 오전
12시가 되어 흑암으로 세상이 어두워졌을 때 일어난 일들입니다. 즉 어두워지고 주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외침을 하신 후에 운명하시기 얼마 전에 발생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2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목이 마르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통상적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얼마나 목이 타시겠는가 라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오전 9시부터 6시간
가까이를 십자가에 달려서 고난을 당하시니 목이 마르신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예 맞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육체적 욕구에 대한 반응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는 시각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죄인에 대한 구속의 성취적 시각으로 보아야 됩니다. 반대로 인간적인 시각과 육체적 정신적 심리적 상태로 십자가를 보거나 해석하면 십자가가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28절의 내가 목이 마르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수식하는 문장이 두 문장이나 됩니다. 왜 예수님께서
목이 마르다고 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설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셨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아셨는가 하면 모든 것을 이미 이룬 줄 아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 가운데 내가 목이 마르다
라는 말씀에 앞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외침이며 절규입니다. 이 말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외침입니다. 이 외침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되어 분리되실 수 없는 분이 영적으로 분리가 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 없으신 그분이 인간들의 죄를 짊어 지심으로 죄인이 되셨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의 죄를 짊어 지시고 그들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인간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왜 십자가입니까? 신명기
21장 23절과 갈라디아서 3장 13절 그리고 베드로전서 2장
24절을 보면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He himself bore our sins" in his body on the cross, so that we might
die to sins and live for righteousness; "by his wounds you have been
healed." 말씀처럼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범죄한 인간이 받아야 할 저주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달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짊어 지심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자리에
섰습니다. 그리고 몸소 그 죄에 대한 심판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이미 이룬 줄 아신 것입니다. 다시
요한 복음 19장 28절을 보면 [요
19: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Later, knowing that everything had now been finished, and so that
Scripture would be fulfilled, Jesus said, "I am thirsty."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은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고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시편 22편 15절 말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시 22: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My mouth is
dried up like a potsherd, and my tongue sticks to the roof of my mouth; you lay
me in the dust of death.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마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지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분은 의식도 없고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말하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자신의 온 의지와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해 받으신 것입니다. 그분은 십자가를 지는 내내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을 복종시켰으며 성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성취되기 위하여 끝임 없이 순종하셨습니다 그것이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고통 가운데서도 그분은 성경을 성취하는 것으로 성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받들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닮는 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예수를 닮으라고 요청하는 것은 바로 성부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순종과 헌신입니다. 이 땅을 사시는 동안 예수님은 늘 성부 하나님의 뜻을 따랐으며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예수님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단순히 성자 하나님으로써의 삶이 아니라 우리가 똑같은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써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삼년 동안 예수님을 통하여 배운 것이 귀신 쫓는
법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바다를 갈라 육지를 만드는 법을 배운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빵을 내리는 법을 배운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배운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법이며 하나님을 믿는 자로써의 삶에 대한 것입니다. 천국 백성의 삶에 대하여 예수님을
통하여 배운 것입니다. 인격을 배우고 성품을 배우고 사람됨을 배우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미운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대하여야 하는지를 배운 것입니다. 이제 요한복음 19장 29절 말씀을 보면 [요 19: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A jar of wine vinegar was
there, so they soaked a sponge in it, put the sponge on a stalk of the hyssop
plant, and lifted it to Jesus' lips. 십자가에 달린 자들을 지키던 군병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그릇에 담겨 있는 신 포도주를 해융에 적셔 우슬초 줄기에 매달아 예수님께 드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받아 마십니다.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
군병들이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드린 것이 두번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쓸개를 탄 포도주를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드리지만 마시지 않습니다. 이 포도주는 고통을 잊게 해 주는 진통제 역할을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줄여 주는 것을 받지 않습니다. 의도적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십자가에서 받으신 신 포도주는 시편 69장 21절을 보면 [시 69:21]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They put gall in my food and gave me vinegar for my
thirst.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받으신 것입니다. 요한은 이 부분에서 우슬초라는
단어를 굳이 사용함으로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는 어린 양이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날에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우슬초에 묻혀서 집의 좌우 설주와 안방에 바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로 인한 죽으심임을 알리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30절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을 보면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When he had received the drink, Jesus
said, "It is finished." With that, he bowed his head and gave up his
spirit. 신 포도주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는 말씀과 함께 운명하십니다. 요한은
마지막 말씀은 기록하지 않습니다. 30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셔야 하는 모든 일들을 이루셨다는 의미도 되고
메시야로 이 땅에 오셔서 감당하셔야 할 모든 일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 이루었다는 라는 말씀에서
사용된 단어는 단순히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이루었다 라는 성취적 선언이라기 보다는 그분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들이 정체가 무엇이며 진실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다 이루었다 라는 말은 헬라어 테텔레스타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을 성취하다라는 뜻도 있지만 이 단어는 상업적인 용어에 상용된다는 사실이 의미가 있습니다. 상업적인 용어로 사용한다는 의미는 이 단어는 매매 할 때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매매의 언제 이 단어를 사용하는가 하면 값을 지불했다로 거래가 성사가 되어 물건을 산 사람이 판 사람에게 값을 지불한 후에 하는 말입니다. 그것으로 이제 그 거래의 물건은 산 사람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테텔레스타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신 십자가를 통하여
성취하신 것이 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 죄인된 인간들을 위하여 자신을 몸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값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죄를 지음으로 모든 자들은 죄에 대한 댓가를 지불해야 하며 그 대가를 분명하게
받아야 함에도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불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 즉 다 지불되었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저와 여러분의 죄의 삯이 지불된 장소입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합니다. 사망이라는 것은 단순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장소인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말하며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자신의 피를 값을 치루시고 사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은 죄의 심판에서 구원하셔서 죄로부터 해방하셨다는
의미도 있지만 이제 소유권이 예수님께로 넘어갔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의 소유냐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제 너희가 죄의 종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이유는 죄에서
사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누구의 소유가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소유로 사셔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그 값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 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여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분의 값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에 맞지 않게 사는 것은 값이 없는 싸구려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무엇이 싸구려 인생입니까? 건져 내었더니 도로 죄악 속에 살며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싸구려 인생을 삽니까? 자신들이 얼마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얼마나 큰 값을 지불하고 사신 지도 모른 체 값싼 인생을 삽니다. 가치 있는 인생을 사십시오.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셔야 합니다. 그분이 주인 되어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