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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말씀
2025.09.30 15:35

야곱의 씨름의 본질

Y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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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com/live/b7MC4PVZc2Q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야곱에게 실제적으로 일어난 일들이 무엇이며 무슨 의미인가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내용들은 신비적인 면이 많이 있기 때문에 다양한 이해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창세기 3224절의 내용을 봅시다. [ 32: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So Jacob was left alone, and a man wrestled with him till daybreak. 이 구절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야곱에게 얍복강에서 일어난 일이 야곱의 기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야곱이 얍복강을 건너지 않고 홀로 있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지금 에서가 400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자신에게 오고 있다는 소리 때문에 얍복강에서 주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두려움에 빠졌고 그의 마음은 공포감에 짓눌려 있는 상태이며 정신을 잃을 정도로 혼란한 상태입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는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자신의 기도에 분명한 응답이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짐승을 종류대로 때를 나눕니다. 550여 마리의 짐승을 종류대로 떼를 나누고 종류별로 각기 시간차를 두어 그보다 앞서 보냅니다. 그 이유는 형 에서를 예물을 통하여 달래기 위해서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시간차를 두고 형 에서에게 보내는 예물이 에서의 마음을 달래고 자신이 그를 속인 것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될 것이라고 믿었으며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얍복강을 쉽게 건너지 못합니다. 밤이 되어서야 야곱은 자신의 아내들과 자식들을 소유물들로 얍복강을 건너게 합니다. 그러나 그는 건너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혼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모습에 대하여 그가 홀로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홀로 남아 하나님께 치열하게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씨름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더욱 확신을 가지고 믿게 합니다. 성경이 야곱이 치열하게 목숨 걸고 기도하는 모습을 씨름에 비유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치열하게 목숨을 걸고 기도한 결과 그는 승리하여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자가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또한 야곱처럼 치열하게 그리고 목숨걸고 마치 환도뼈가 부러지도록 씨름하듯이 온몸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제가 그렇게 배웠습니다. 기도는 야곱처럼 환도뼈가 부러지도록 씨름하듯이 해야 하기에 기도로 영적 씨름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듯이 나의 인생에도 야곱처럼 하나님과 싸워서 이긴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싸워서 이긴다는 의미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치열하게 싸우는 것으로 환도뼈가 부러질 정도가 되어야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이라는 것이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주지 않으려는 하나님과 무조건 목숨 걸고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어 낼 때까지 환도뼈가 부러지도록 싸워서 얻어내야 하는 신자와의 대결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신자의 대결이라니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의외로 신앙이 특히 기도가 이런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간절히 즉 간이 저리도록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웬만해서는 응답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잘 주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마치 한 밤중에 떡 세덩이를 빌리기 위해 친구 집에 찾아가 간청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불의한 재판장에게 자신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계속 찾아가 괴롭게 하는 과부처럼 기도는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것은 마치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라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불경죄에 해당합니다. 성경을 몰라도 너무 모르며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것입니다. 모든 기도의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의미는 하나님은 더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육신의 아버지보다도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마치 인색하신 하나님으로 그리고 싸움과 투쟁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것은 얼마나 불경한 것이며 불신적인 것이며 악한 것입니까?

        24절이 말하고 있는 부분을 조금만 신경을 써도 우리는 그러한 잘못된 성경 해석이나 하나님께 불경스러운 태도나 자세를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24절이 말하고 있는 것은 야곱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씨름을 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싸움은 야곱이 건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건 싸움입니다. 24절을 봅시다. [ 32: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So Jacob was left alone, and a man wrestled with him till daybreak. 여기서 야곱이 씨름을 주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씨름을 주도 하고 있는 것은 어떤 사람입니다. 그가 누구인지는 지금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도 현재는 모르고 있는 상태입니다. 한 밤중에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어찌 보면 야곱은 급습을 당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정체가 누구인지를 모른 채로 그와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25절을 보면 [ 32: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When the man saw that he could not overpower him, he touched the socket of Jacob's hip so that his hip was wrenched as he wrestled with the man.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는 사람 즉 상황을 깨닫고 있는 사람 그리고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야곱이 아닙니다. 즉 누구의 관점으로 씨름이 묘사 되는가 하면 야곱이 아닌 어떤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야곱의 씨름을 야곱의 기도로만 이해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체의 내용 속에는 야곱이 애걸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야곱은 이러한 애걸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야곱의 씨름이 무엇에 대한 내용이며 의미인가를 살펴봅시다. 먼저 우리는 24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와서 씨름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야곱이 그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알지 못했습니다. 창세기 3230절을 보면 [ 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So Jacob called the place Peniel, saying, "It is because I saw God face to face, and yet my life was spared." 라고 합니다. 야곱은 싸움이 끝이 난 후에야 자신이 씨름한 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음에도 죽지 않았다 라는 이유입니다. 야곱은 사건이 종결된 후에야 자신과 싸움을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24절로 돌아가서 야곱에게 싸움을 거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야곱과 싸움을 하신 것입니까?

        25절을 보면 [ 32: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When the man saw that he could not overpower him, he touched the socket of Jacob's hip so that his hip was wrenched as he wrestled with the man.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기려고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오신 이유는 야곱을 이기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결코 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왜 야곱을 이기시려고 하시는가? 이긴다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며 의미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입니다. 또한 야곱은 결코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기지 못하시자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셨습니다. 어떤 학생이 이 내용을 듣다가 갑자기 손을 들고 하나님께서 반칙해도 됩니까? 씨름에서 상대를 치는 것은 반칙입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환도뼈인 허벅지 관절을 치셨습니까? 여기서 치다는 말은 만지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뼈가 위골이 되어서 야곱이 이 후에 다리를 절게 됩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구절을 찾아 봅시다. 호세아서 123-4절을 보면 [ 12:3-4]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In the womb he grasped his brother's heel; as a man he struggled with God. He struggled with the angel and overcame him; he wept and begged for his favor. He found him at Bethel and talked with him there- 분명이 이 구절은 야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었다고 하는데 야곱이 힘이 센 것은 사실입니다. 여러 명이 들어 옮길 수 있는 우물을 막는 돌을 혼자서 옮길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힘으로는 이라는 말은 장년이 되어서 혹은 어른이 되어서의 의미입니다. 즉 그는 모태에서는 형의 발뒤꿈치를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는 하나님과 다투는 자라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4절에서는 천사와 겨루어 이기었다고 하는데 이기다는 압도하다 라는 뜻으로 천사를 압도했습니다. 그리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다고 합니다.

        이 구절들은 야곱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야곱이 잘났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야곱을 칭찬하거나 높이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호세아 122절을 봅니다. [ 12:2] 여호와께서 유다와 논쟁하시고 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 The Lord has a charge to bring against Judah; he will punish Jacob according to his ways and repay him according to his deeds. 이 구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 하나님께서 경고하시며 책망하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와 논쟁하십니다. 또한 야곱을 그 행실대로 즉 그가 행한대로 벌하시고 보응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다와 야곱은 동일한 의미로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예로 등장하는 것이 그의 조상 야곱입니다. 이 의미는 너희는 너희 조상 야곱과 같은 자라는 것을 가리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는 모태에서부터 형의 발 뒤꿈치를 붙잡고 어른이 되어서는 하나님과 다투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천사와 싸워서 압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는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던 것처럼 너희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냥 두지 않으시고 벌하시며 그 행위대로 갚아 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구절들이 말해주는 것은 다시 말해 야곱의 삶은 하나님께 전혀 인정받을 수 없는 삶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늘 하나님과 다투는 자였으며 하나님께 순종을 거부하며 사는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얍복강에서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싸움을 거시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야곱은 변화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하나님 다투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이용하며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2815절을 보면 [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I am with you and will watch over you wherever you go, and I will bring you back to this land. I will not leave you until I have done what I have promised you." 이 구절에서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야곱이 여행 갔다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믿음의 사람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을 만들기로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부분을 더욱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로마서 911절을 보면 [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Yet, before the twins were born or had done anything good or bad-in order that God's purpose in election might stand: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택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고 즉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야곱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사람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 인하여 의롭게 되어지는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변화시키는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얍복강은 이제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관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만나시기 위해 오신 것이 그가 변화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하나님과 다투고 있습니다. 변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변화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환도뼈를 치십니다. 성경은 환도뼈는 생식기와 연관이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맹세를 하는 부분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찾아 떠나는 종에게 자신의 환도뼈에 손을 넣고 맹세하라고 합니다. 이 부분은 맹세와 더불어 자손을 번식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상징적인 부분으로 힘의 근원입니다. 즉 야곱의 힘의 근원과 삶의 근원을 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3226절을 보면 [ 32: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Then the man said, "Let me go, for it is daybreak." But Jacob replied, "I will not let you go unless you bless me."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야곱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26절은 겉으로 들어난 사건이 아니라 야곱의 내면에 어떤 변화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이제야 그분이 누구신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축복을 해 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환도뼈가 위골되고 하나님께서 떠나려 하실 때에 야곱은 이제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떠한 분이신지를 깨달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자신의 인생이 어떠한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에서는 울며 간구하였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야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자신이 어떠한 자를 알게 된 것입니다. 야곱의 내면에 어떠한 일들이 발생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이제 그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며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창세기 3227절을 봅시다. [ 32: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The man asked him, "What is your name?" "Jacob," he answered. 27절은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인지를 스스로 고백하게 합니다. 이유는 참된 회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직시하며 하나님 앞에 발가벗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숨기는 것이 없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러내며 나타냅니다. 이유는 하나님은 다 아시는 분이시며 어떠한 죄와 연약함과 부끄러움도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감싸 안으실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로 하여금 자신이 어떤 자였는지에 대하여 고백하며 알게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과 성품이며 그 사람 됨됨이 입니다. 야곱은 그의 이름처럼 뒷발꿈치를 잡고 속이고 넘어트리고 쓰러트리는 자입니다. 야곱이 내 이름은 야곱이니이다 라는 말은 나는 그렇게 살아온 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다른 이름을 주십니다. 창세기 3228절을 보면 [ 32: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Then the man said, "Your name will no longer be Jacob, but Israel, because you have struggled with God and with humans and have overcome."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과 겨루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라고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야곱이 이겼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꺾였다는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가 오히려 붙잡고 놓아주지 안으면서 축복해 달라고 울며 애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굴복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에게 이겼다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그의 승리가 다른 차원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했으며 하나님의 계획을 이룬 자로써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신의 뜻을 이룬 승리자란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성취한 자로써 승리자의 뜻을 가지는 것입니다. 또한 이 이름 안에는 하나님의 다스리림을 받는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겨루고 다투는 일을 통하여 그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은 신자가 어떻게 신자가 될 수 있으며 신자답게 되어 가는지에 대하여 보여주고 있는 이 모든 일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통하여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가 세상에 있기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택하셨고 인도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그분은 여전히 우리의 인생에 간섭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도록 섭리하고 계십니다. 신자라고 불리우는 자들 즉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뜻을 받들어 살고자 하는 자들은 이미 얍복강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굴복하고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없음을 선언하였으며 하나님께서 떠나시면 안되기에 하나님을 향하여 복 주시기를 원하며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경험하셨습니까? 그래서 굴복하셨습니까? 하나님 만이 주인이라고 하나님께서 나를 떠나시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붙들고 계십니까? 또는 아직도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끊임없이 얍복강 언저리에서 자신의 고집대로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언젠가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모두가 이 하나님을 만났으면 합니다.

 





주일 말씀 요약 및 설교 영상

주일 말씀 컬럼 안에 설교 영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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