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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말씀
2025.10.15 16:48

그리스도인 간의 관계

Y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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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영상https://youtube.com/live/AbOMdK32mlM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 본문의 내용들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이미 앞서 살펴본 내용들에게 욥이 친구들에게 느끼는 그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욥은 낙망한 상태이고 절망한 상태입니다. 그렇기는 그는 위로를 기대하며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은 그를 위로하기는 커녕 정죄하며 비난하기에 힘을 쏟고 있었습니다. 욥기 614절을 보면 [ 6:14]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Anyone who withholds kindness from a friend forsakes the fear of the Almighty. 욥이 그의 친구들에게 바란 위로는 단순한 감정의 터치나 진심이 담기지 않은 위로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정말로 원한 것은 그들의 신앙적인 형제애였습니다. 그 단어가 동정이라고 번역된 불쌍히 여기다는 라는 용어로 사용된 헤세드입니다. 이것은 인애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인애란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무조건적이고 자발적인 충성과 헌신과 사랑입니다. 비록 욥이 자신의 모든 재산을 잃고 또한 모든 사회적 지위와 권위를 잃고 또한 사랑하는 자녀들을 잃고 그의 아내에게로부터 버림을 당한 처지에 있었지만 신앙의 형제들인 그들 만큼은 그에게 형제애인 인애를 나타내었어야 합니다.

        우리가 욥기를 읽으면서 구분해야 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도 형제를 두둔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순결권 즉 교회의 순결함을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는 권면이나 책망이 있어야 됨을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8:15절을 보면 [ 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If your brother or sister sins, go and point out their fault, just between the two of you. If they listen to you, you have won them over.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고 합니다. 둘 사이에서만 하라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음절을 보면 16-17절에서 [ 18:16-17]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But if they will not listen, take one or two others along, so that 'every matter may be established by the testimony of two or three witnesses.' If they still refuse to listen, tell it to the church; and if they refuse to listen even to the church, treat them as you would a pagan or a tax collector. 형제가 범죄하였을 때에 만일 개인적인 권고를 듣지 않으면 두 세 사람이 가서 권면하고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같이 여기라고 합니다. 잘못된 것을 책망하고 바르게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결국에는 형제가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바라는 용서가 준비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기를 통하여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그것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욥에게는 아직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정죄하며 비난하는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온 모든 비난의 말은 모두다 그들의 사고속에서 나온 추정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법 가운데는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죄가 확정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범법자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아직 법의 판결이 나기 전에는 추정이나 생각만 가지고 정죄하는 것을 금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명확한 증거가 없음에도 감정에 따라 그리고 자기 확신으로 죄가 없는 자를 죄인으로 몰아가며 정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죄 없는 자를 함부로 정죄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게 하는 최소한의 장치인 것입니다.

        욥기를 읽으면 친구들의 모든 정죄는 그럴 것이다 하는 자신들의 생각이 가득함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정죄의 논리는 의인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망하지 않으며 오히려 악인의 삶이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욥기 813절을 보면 [ 8:13]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지리니 Such is the destiny of all who forget God; so perishes the hope of the godless.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은 빌닷의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와 불경건하거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의 삶은 망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빌닷은 지금 욥을 빗대어 하는 말로 그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고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과응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과응보를 하시는 분이라는 이들의 이해는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인생 가운데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과 고난은 꼭 인과응보의 결과만으로 해석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들의 주장에 대한 욥의 반론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벌하시며 그들을 쉬지 못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징계가 그들의 머리 위에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일을 보며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악인이 때론 너무나 형통한 삶을 산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마음껏 즐기다 죽는 경우도 보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의인이 고난을 당하며 어려움을 겪는 것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욥기 922절을 보면 [ 9:22] 일이 다 같은 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It is all the same; that is why I say, 'He destroys both the blameless and the wicked.' 라는 말씀이 의인이나 악한 자나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욥의 자기 변론에 욥의 친구 소발이 말합니다. 욥기 112절을 보면 [ 11:2]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말이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Are all these words to go unanswered? Is this talker to be vindicated? 이 말씀을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네가 하는 헛소리를 듣고서, 어느 누가 잠잠할 수 있겠느냐? 말이면 다 말인 줄 아느냐? 입니다. 너는 정말 말을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말하는 욥을 말이 많다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욥의 답답함을 이들은 헤아리지 않습니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욥을 정죄해 놓고 이들은 그것에 맞추어 욥을 몰아가며 말이 못하도록 입을 닫도록 요구하는 것입니다. 욥의 자기 변론은 계속해서 허공을 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도 모자라 소발은 욥의 가슴에 쐐기를 박는 말을 합니다. 욥기 116절을 보면 [ 11:6] 지혜의 오묘함으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 and disclose to you the secrets of wisdom, for true wisdom has two sides. Know this: God has even forgotten some of your sin. 소발은 네가 지혜가 없어서 스스로의 죄를 깨닫지 못한다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너는 말이 너무 많고 지식도 없어서 너는 네 죄가 무엇인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책망에 욥이 얼마나 답답할런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에 욥의 가슴에 못질을 하는 것이 너는 알아야 되는데 하나님의 벌하신 것이 네 죄보다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아느냐? 라는 말입니다. 지금 욥의 고난도 모자라 더 고난을 받으며 지금 보다 더 고통을 당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상처에 소금을 대고 문지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친구들의 말에 욥이 말합니다. 욥기 133-4절을 보면 [ 13:3-4]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 없는 의원이니라 But I desire to speak to the Almighty and to argue my case with God. You, however, smear me with lies; you are worthless physicians, all of you! 이제 욥은 친구들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전능자에게 말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변론을 청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욥이 친구들과 논쟁에서 말을 잃어버리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두 그의 말을 왜곡하며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기 1313절에서 [ 13:13] 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닥치든지 내가 당하리라 "Keep silent and let me speak; then let come to me what may. 욥은 나를 내버려 두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나에게 말하지 말고 나를 내버려 두어서 내가 무슨 일을 하던지 내가 당할 테니까 신경 끄라는 것입니다.

        왜 욥과 그의 친구들간에 이런 일들이 벌어졌습니까? 무엇이 신앙안에서 형제애로 하나가 되었던 이들을 갈라놓을 뿐만 아니라 원수가 되어 상대의 가슴에 비수를 꽂으며 죽이려 합니까? 서로의 사랑과 하나됨은 어디로 가고 이제는 비난과 정죄만이 이 둘 사이에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 둘 사이의 간극의 원인을 여러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소통의 부재라는 것입니다. 소통이란 서로가 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통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생각하는 바가 서로 통함 입니다. 생각이나 사고 등의 의사가 통함으로 막힘이 없는 것을 뜻합니다. 소통의 부재라는 것은 생각하는 바나 사고하는 바가 서로 잘 통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친구들에게는 두 종류의 소통의 부재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소통의 부재입니다. 이들은 줄곧 욥을 자신들의 논리로 압박하였습니다. 이 논리는 자신들에게는 신앙적인 논리였고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 논리였습니다. 이들은 욥에게 마치 자신들을 하나님의 대변인처럼 대하였습니다. 자신들의 말이 마치 하나님의 말씀처럼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들의 말은 진실이 아니었으며 하나님의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그랬기에 결국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고 회개하여야만 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지도 못하면서 떠든 것이었으며 자신들이 만들어낸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전했던 것입니다.

        참된 소통은 하나님과 그 생각하는 바가 통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과 참된 소통합니까? 오늘 우리 손에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소통합니다. 그분의 분명한 말씀이 있기에 그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잘못된 지식과 진리를 분별해 내는 것입니다. 말씀을 바르게 이해함은 참된 소통의 통로입니다. 또한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를 소통하게 통로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며 기도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되며 깨닫게 됩니다. 만약 욥의 친구들이 하나님과 바른 소통을 하고 있었다면 그들은 욥을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않았을 것이며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분의 지혜를 요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이 고난의 이유를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서로 관계를 훼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소통의 부재로 인하여 형제와 같은 친구와의 관계가 단절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않은 상태에서 신자간의 관계가 바르게 되기란 쉽지 않습니다. 아니 된다 해도 그것은 인간적인 관계일 뿐 신앙적인 관계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적이지 않고 인간적인 관계가 형성됩니다. 인간적으로 사랑하고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고 용서하고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황에 따라 바뀌며 환경에 따라 바뀔 수 있습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 적이 될 수 있는 것이 인간적이라는 말속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신앙적이라는 것은 그 모든 것을 뛰어 넘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복종에 근거하고 동기가 부여된 것이기에 나의 감정과 상태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뜻이기에 사랑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교회 안에서의 모든 관계는 신앙적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의 소통의 부재는 가장 가까운 형제이자 친구인 욥과 소통의 부재입니다. 이 소통의 부재가 불러 오는 문제는 오해입니다. 친구의 고통을 보면서도 그것을 감싸지 못하고 함께 애통하지 못하며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에 있는 욥에 대한 오해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욥은 당대에 의인이었습니다. 그의 경건은 내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욥기 1장에서 보다시피 욥의 경건은 외면에서도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경건이란 내면화가 먼저이지만 외향화 즉 밖으로 나오는 것은 내면화의 자연스런 현상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욥의 삶은 경건한 삶의 모습이 나타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오랜 동안 그를 보았으면서도 그의 내면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오해하며 그에게 숨겨진 죄를 추궁하기까지 합니다. 오해가 불신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불신은 욥의 마음을 닫게 하고 그의 마음을 죽이는데 까지 나아갑니다.

        소통의 부재에서 나온 오해와 불신은 결국 욥을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데서 온 것입니다.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의 편에 서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통은 생각하는 바가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바가 서로 통하기 위해서는 내편에서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상대편에 설 때에 그의 생각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통이라는 것은 내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통이란 듣는 것입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고 상대의 마음을 듣는 것이고 상대의 의도를 듣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통입니다. 오늘날 세상 속에서 벌어지는 관계의 단절과 다툼과 싸움은 결국 이런 바른 소통의 부재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는 교회 안에서도 성도들간의 간격을 만들어 서로 다투며 싸우며 비난하며 정죄하기도 합니다. 이유는 먼저 들으려 하지 않고 상대편에 서서 생각해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신의 이야기만 하며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웁니다. 그렇기에 결국에는 다툼과 싸움이 난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우리와 소통하셨습니다. 우리 편에서 우리의 약함을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 된 우리를 무조건 의로워지라고 무리한 요구를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그분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그것을 자신이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와 소통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이루신 그 소통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소통은 이렇게 상대 편에서 생각하며 행동함으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통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먼저 잘 들어야 합니다. 상대의 마음을 들어야 하며 상대의 의도를 들어야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오염된 우리의 마음은 늘 내 편에서만 생각하고 판단하고 이해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감정이 우선이고 내 마음이 우선이며 내 생각이 우선입니다. 그렇기에 상대의 의도 없고 의미 없는 행동에도 불쾌해하며 화를 내기도하고 오해하여 관계를 악화시키기도 합니다. 이유는 내가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죄성 때문입니다.

        제대로 된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편에서 생각하는 사고를 가지셔야 합니다. 이러한 참된 소통의 근거는 사랑입니다. 신앙에 근거한 사랑은 서로를 묶어주며 신뢰하게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이 사랑이라고 말할 때 사랑을 행복하거나 기쁘거나 즐겁다고 하지 않고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참된 형제 사랑은 참된 소통을 만들게 됨으로 형제애를 만들며 헤세드의 사랑을 서로에게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주일 말씀 요약 및 설교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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