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com/live/DoBr_qlcR_g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은 그 해석이 여러 가지로 의견이 분분한 본문 중 하나입니다. 바로 아담과 하와의 아들들인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부분을 함께 자세히 살펴봄으로 본문에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려 합니다. 이 이야기는 에덴
동산에서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의 이야기로 인류의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창세기 4장 1절을 보면
[창 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dam made love to his wife Eve, and she became pregnant
and gave birth to Cain. She said, "With the help of the Lord I have
brought forth a man." 아담과 하와는 첫 아이를 얻게 됩니다. 그 아이의 이름을 가인이라고 짓습니다. 그 뜻은 얻다 라는 뜻인데
의미는 하나님으로부터 얻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마도 어원은 얻다라는 뜻인 가나흐 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또 하나의 아들을 얻게 됩니다. 다음절인 창세기
4장 2절을 보면 [창 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Later she gave birth to his
brother Abel. Now Abel kept flocks, and Cain worked the soil. 둘째 아들의 이름은 아벨입니다. 이름의 뜻은 공허 숨 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단어가 전도서의 헛되고 헛되며 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왜
이렇게 이름을 지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둘은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벨은 양을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를 짓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좀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아벨은 굳이 양을 치는 자라기 보다는 떼를 기르는자로 꼭 양만을 기르는 자는 아니었습니다. 가인의
경우에는 그는 원문을 직역하면 땅을 섬기는 자 혹은 경작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땅을 섬긴다고 해서
이 사람은 땅에 속한 사람이고 아벨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 말은 단지 그들의
직업에 관한 소개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제 중요한 3절 내용이
시작됩니다. 3절을 보면 [창 4:3-4]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In the course of time Cain brought some of the fruits of the soil as an
offering to the Lord. And Abel also brought an offering-fat portions from some
of the firstborn of his flock. The Lord looked with favor on Abel and his
offering, 이 두 사람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가인은 그 땅의
소산으로 제물 삼아 하나님께 드립니다. 소산이란 그 땅의 열매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아벨도 제물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의 제물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이었습니다. 아벨이 드린 제물은 암양 새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기름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5절을 보면
[창 4: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but on Cain and his offering he did not look with favor. So Cain
was very angry, and his face was downcast. 그
제사를 드린 후에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이에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가인이 매우 빨갛게 되었고 그의 얼굴이
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즉 화가 나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랐고 얼굴을 숙이며 분을 내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는가에 대한 질문을 해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성경을 잘못 해석하게 됩니다. 이런 이유는
가인과 아벨의 제물의 차이점에서 그 원인을 찾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제사는 자신의 소산 가운데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암양 첫 새끼들과 그 기름을 드렸습니다. 제물에 차이점이 있다면 농산물로 드린 것과 짐승을 드린 것의 차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피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피흘림이 없기 때문에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구절은 히브리서 9장22절을
보면 [히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In fact, the law requires that nearly everything be cleansed with
blood, and without the shedding of blood there is no forgiveness. 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율법이 주어진 후의 제사 제도에
대한 말씀이며 또한 속죄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라고 말씀한
것은 사실입니다. 죄를 사하는 것은 그 죄에 대한 값 즉 피를 흘려야만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가 죄를 사함 받기 위하여 드린 속죄 제사인가 하는 부분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가인은 피를 흘리지 않은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제사에 관한 유일한 힌트가 하나 나오는데 3절에 나오는 첫 단어입니다. 다시 창세 4장 3절을 보면 [창 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In the course of time Cain brought some
of the fruits of the soil as an offering to the Lord. 세월이 지난 후에 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이 본 제사의 의미를 이해하게
합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라는 말은 아담과 하와가 가인과 아벨을 낳고 세월이 얼마가 지나서 그들이
장성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날들의 끝에 라는 말입니다. 날들의 끝에라는 말은 어떤 특정한 날들이 있는데 그 날들의 끝자락에서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과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가인이 그 땅의 소산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농사지어서 얻은 열매 입니다. 그렇다면 이때는 아마도 추수를 끝내었을
때입니다. 이것과 연결해 보면 날들의 끝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추수기의 어느 시점을 가리킨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가 죄를 사하는 속죄의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께 추수의
감사 혹은 한 해를 돌아 보며 모든 것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 제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드린 제물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면 본문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영화에서는 가인과 아벨이 제물을 드릴 때 가인이 다 썩은 곡식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드리는 장면을 연출합니다.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은 가인이 정성 없이 드린 제물이 문제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 것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성경은 제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음을 아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제사를 열납하셨다는 말씀을 하실 때 제물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으시고 사람의 이름을 앞에 두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그리고 가인과 그의 제물이라는 표현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제물은 그 드린 사람 자신과 관련이 있을 뿐이지 제물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을 좀더 명확히 하기 위해서 저는 성경 한곳을 더 살펴보길 원합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입니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By faith Abel brought God a better offering than Cain
did. By faith he was commended as righteous, when God spoke well of his
offerings. And by faith Abel still speaks, even though he is dead. 이
본문에서 우리는 아벨의 제사가 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사였는지를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구요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는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여전히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아벨의 제사를 표현하는데 사용된 단어가 있는데 그 단어가 바로 믿음으로
입니다.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더 나은 제사인가 하면 믿음으로 드린 제사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제사를 드림으로
의로운 자로 증명 되어 졌다고 합니다. 아벨이 의로운 것은 제물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가진 그 믿음 때문에 그는 의로운 자로 하나님에 의해 증명 되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제물을 받으신 것이 제물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드리는 그가 믿음이란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아벨이 제사를 가졌던 그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며 무엇이길래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으며 의로운 자로 인정이 되었는가 하는 물음에 답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조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려야 한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으로 제사를 드린 다는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고 그 믿음으로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을 한 사람씩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을 처음으로 설명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1절 말씀입니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Now faith is confidence in what we hope for and assurance about
what we do not see. 믿음이란 무엇이냐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참 알 것 같으면서도 물어 보면 모르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하면 같은 의미를 두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바라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 그리고 실상과 증거인데 저자는 이 둘의 같은 의미를 두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바라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의 실체이며 확증이라는 것인데 이 의미는 아직 우리 손에 또는 우리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것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설명해 주는 것이 3절인데 히브리서 11장 3절을 보면 [히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By faith we
understand that the universe was formed at God's command, so that what is seen
was not made out of what was visible.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을 우리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본 것처럼 확신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의 믿음은
구약의 인물들에 대한 믿음으로 이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으로 그렇게 되어질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등장하는 사람들이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모세, 라합 등등 입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정리해 주는 구절이 6절 말씀입니다. 6절을 보면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And without faith it is impossible to
please God, because anyone who comes to him must believe that he exists and
that he rewards those who earnestly seek him.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시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가지고 아벨의 문제를 풀어 보면 그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그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확신하였으며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다가 한번 제사드릴 때 하나님을 확신하였고 하나님을 그의 삶 속에서 인정하였다고 생각
할 수 없습니다. 아벨과 가인이 날들의 끝 날에 하나님께 제사하였다는 사실을 상기 하셔야 합니다. 그는 날들의 끝 날이 이르도록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신뢰 속에서 삶을 살았고 그 앞에 그가 계신 믿음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의 제사는 이런 믿음이 결여된 제사였습니다.
하나님이 누구 신지에 대하여 확신하지 못한 체 제사를 드렸으며 그의 삶 또한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아벨의 제사는 오늘날로 비교 하자면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아벨은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통하였고 관계를 맺었으며 그분을 경배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벨의 제사가 우리에게 주는 내용은 예배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살다가 주일날 와서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확신한다고 하는 것은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그가 계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아벨은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삶의 자세와 태도를 가졌습니다. 매 삶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사를 받으신 것은 그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이었고 그런 삶의 바탕 속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제물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나님께 가지고 오는 가가 아니라 여러분의 삶의 자세와 삶의 태도와 그분을 삶 속에서 인정하며 그분을
위하여 살은 삶을 가지고 나오셔야 합니다. 오늘날도 가인과 같은 자세로 하나님께 나오는 자들이 있습니다. 삶 속에서는 전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기뻐 받으실 수가 없습니다. 이유는 믿음으로 드려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하나님을 삶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주인이 되셔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드려야 할 믿음이 빠져
버린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예배일 뿐입니다. 우리는 예배가 주일날에만 와서 드리는 것일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가 되어야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일날만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의미 없는 예배일 뿐이며 내용 없는 신앙 고백일 뿐입니다. 주일에 드리는 우리의
예배는 우리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삶이 근거가 되고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주일에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을 예배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은 모두 그분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분이 계신 것을 믿기에 행하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의 삶에서는 그분을 인정하지 않고 그분과 믿지 않고 신뢰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살다가 주일에 와서 당신은 내 주인이시며 내
삶의 주권자이십니다. 라는 고백이 얼마나 생뚱맞은 고백입니까.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그분이 우리 삶의 주권자이시고 주인이시며 내 구원자 되심을 고백하며 그분과 더불어 믿음으로 사는 삶 자체가 바로 예배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가지고 나와서 하나님께 고백하며 예배하는 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