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주일말씀
2025.11.10 14:13

기도와 낙심

YC
조회 수 11 추천 수 0 댓글 0

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com/live/IxIZw2RtkZo

우리는 지난 시간에 기도의 강청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강청이란 끈질기게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요구하는 응답의 방법으로써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뻔뻔함과 부끄러움이 없는 당당함으로 기도하는 자세로써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런 기도의 자세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항상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 말미암아 얻어진 것으로 우리는 당당할 수 없는 형편에서 요구할 것이 없는 자리에서 요구할 수 있는 자리로 그리고 뻔뻔스렵게 요구할 수 있는 위치로 부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이 바로 기도라고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기도의 또 다른 부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기도와 응답이라는 것을 우리는 당연한 신앙 공식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도와 응답이 아니라 기도와 낙심이라는 방식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기도하는데 낙심하게되는 것은 기도의 응답의 지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기도가 어떻게 낙심으로 나아가게 되는가 하는 것과 응답의 지연의 문제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며 이해해야 하는 것에 대하여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와 믿음과의 관계와 종말의 때의 기도에 대하여도 살펴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정당한 것이며 바른 요구이고 마땅히 들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셔서 우리를 당황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1절을 보면 [ 18: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Then Jesus told his disciples a parable to show them that they should always pray and not give up.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1절이 중요합니다.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낙망치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낙망 이라는 말은 지치다, 아주 기운이 없다, 기진 맥진하다, 실망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기도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힘이 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또한 아주 기운을 빼버리고 기진 맥진하게 해서 낙심하게 합니다. 또한 더 나아가 실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망이라는 것은 대상이 있습니다. 기도에 실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도가 인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실망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즉 기도자가 기도의 응답자이신 하나님께 아주 크게 실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망은 기대를 저버린 것입니다. 소망을 꺾어 버리고 더 이상 의지 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기도자에게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말씀이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힘을 얻고 용기를 얻고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소망을 얻으려고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이러한 부분을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기도에 대하여 계속해서 잘못된 이해 속에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오랜 지병이 있는 사람에게 기도하지 않아서 그래, 나 같으면 목숨 걸고 금식하겠다, 정성이 부족해서 그래, 기도하고 의심해서 그래하는 자신의 생각과 사고로 남을 정죄하고 더욱 고통을 배가 시키며 기도하는 자를 마치 기도가 부족한 죄인 취급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잘나서 기도의 응답을 받고 잘나서 원하는 것을 소유한 양 허세를 부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허세이며 교만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기도가 응답이 안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정당한 요구에 말입니다. 또한 밤 낮 부르짖는 대도 말입니다.

   누가복음 182-3절을 보면 [ 18:2-3]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He said: "In a certain town there was a judge who neither feared God nor cared what people thought. And there was a widow in that town who kept coming to him with the plea, 'Grant me justice against my adversary.' 예수님의 비유에 한 과부가 자신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재판장을 찾아 갑니다. 이 재판관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못된 재판관입니다. 이 첫번의 소개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과부가 불쌍하고 그의 요구는 수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재판관이 들어 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부는 계속해서 가서 요구합니다. 그러자 불의한 재판관이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18 4절을 보면 [ 18: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For some time he refused. But finally he said to himself, 'Even though I don't fear God or care what people think,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합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생각은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라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과부를 위한 생각이 아닙니다. 여전히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5절을 보면 그의 생각이 무엇인지가 드러나는데 5절입니다. [ 18: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yet because this widow keeps bothering me, I will see that she gets justice, so that she won't eventually come and attack me!'"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여기서 재판장의 생각에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번거롭게 한다는 것이 끈질기게 매달리는 어떤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번거롭게 해서 하나님이 괴로워서 응답해 주실 것이야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본 비유는 항상 기도하면서 낙심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지 계속 번거롭게 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번거롭다는 것은 수고하다라는 뜻도 있지만 구타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리고 5절 마지막에 나를 괴롭게 하리라 라는 말을 직역하면 눈 아래 부분을 계속해서 때린다 라는 말입니다. 재판장은 과부로 인하여 계속 구타 당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눈 아래를 집중적으로 말입니다. 눈 아래를 집중적으로 구타를 당하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아주 약한 부분인데 말입니다. 이 말은 불의한 재판관이 과부로 인하여 계속 찔리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양심이 계속 망치질 당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무엇 때문이냐면 과부가 계속해서 요구해서가 아닙니다. 이 사람은 악한 자 입니다. 그 정도는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계속해서 이 악한 재판관을 눈 탱이를 치는 것은 이 과부가 가지고 오는 원한입니다. 원한 이라는 단어를 직역하면 변호하다는 뜻인데 정당한 것에 대한 변호이며 권리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과부의 요구는 정당한 것이고 옳은 것이고 의롭다는데 불의한 재판관이 거부하기 힘든 것입니다. 바르지 않다면 정당하지 않다면 옳지 않다면 수백번 찾아와도 양심에 찔리지 않습니다. 가슴을 두드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과부의 원한은 당연한 것이고 마땅한 권리이고 보호받아야 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당연히 응답 받아야 하고 마땅히 옳다고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그렇게 안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원한을 풀어주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우리를 택하신 분이시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7절을 보면 [ 18: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And will not God bring about justice for his chosen ones, who cry out to him day and night? Will he keep putting them off?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지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정당하고 당연히 들어주셔야 하는 기도에 하나님은 분명히 응답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래 참지도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8절에는 [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I tell you, he will see that they get justice, and quickly. However, when the Son of Man comes, will he find faith on the earth?"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라고까지 약속하십니다. 속히 라는 것은 시간적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금방 혹은 당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취에 대한 의미로 반드시 라는 뜻으로 그것을 반드시 행하실 것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분명하게 택한 백성의 원한 즉 정당하고 당연하고 마땅하고 의로운 요구에 반드시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때가 지금 당장이 아니라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요구하는 시간에 맞추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8절 마지막에 그러나 라는 말과 함께 한 구절을 더 덧붙이십니다. 인자가 올 때에 즉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재림하실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는 말씀입니다. 보겠느냐라는 말은 찾겠느냐라는 말로 세상에서 믿음을 찾을 수 있겠느냐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주님 오실 때 세상에서 믿음을 찾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사람들이 낙심하기 때문입니다. 실망하기 때문입니다. 지치고 기운 없고 기진 맥진하여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에 대하여 인가하면? 의롭고 선하고 바르고 정당한 것에 대하여 입니다.

낙심하다 라는 단어가 신약 성경 어디에 사용되었는가를 살펴보면 이 단어는 대부분 선을 행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에 사람들이 낙심하게 되고 실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수고하며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아무런 열매가 맺지 않습니다. 그 정도 했으면 정당한 성과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아무런 열매를 맺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실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더욱 충성하기 위해 건강을 구하고 있습니다. 구제하고 선교하고 섬기기 위해 구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변화되기 위하여 선하게 살고 손해 보며 정직하게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모범된 삶을 나타내기 위해 위험과 어려움과 수고함을 감수하고 세상이 바뀌며 주변이 바뀌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수 있고 하나님은 무응답으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어떤 것들은 우리가 무응답의 이유를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응답하시길 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부족해서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이 부족해서 아닙니다. 우리를 덜 사랑해서도 아니고, 우리가 좀더 의롭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때론 우리가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응답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왜 기도했는데도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갔는지 왜 바울이 기도 했음에도 몸의 가시를 제거해 주시지 않으셨는지 우리가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을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것도 우리를 행해 조금도 인색하지 않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기도와 믿음의 관계에 대하여 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 라는 말씀은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기도는 믿음의 결과입니다. 기도는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의 지연으로 인하여 사람들을 더 이상 기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일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가 오고 있으며,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욱 믿는 일을 해야 하며,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기도하되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라는 하나님에 대하여 실망하거나 원망하거나 그래서 지치거나 마음 상하거나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는데도 우리가 목숨을 걸고 구하는데도 응답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우리의 기도는 지금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는 이 땅에서가 아니라 주님이 오는 날 응답될 것입니다. 우리가 질병에서 완전히 해방되며 더 이상 걱정하지 않고 사는 것, 의식주 문제로 고민하며 그 묶임에서 해방되며 놓이는 것, 세상의 불의에 힘들어 하며 정의롭고 완전한 세상을 기대하는 것, 모든 사람이 주님의 영광 아래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사는 것,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차는 것, 땅 끝까지 복음이 증거되는 것 이 모든 우리의 기도가 주님이 오시는 그날에 응답 될 것입니다. 오늘 당장 지금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다고 하나님에 대하여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우리의 원한을 풀어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우리의 원한을 풀어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주일 말씀 요약 및 설교 영상

주일 말씀 컬럼 안에 설교 영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수
1173 로마서 강해 218강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김 로마서 11장 13절 new 2025.11.10 11
» 주일말씀 기도와 낙심 new 2025.11.10 11
1171 로마서 강해 217강 유대인들에 대한 오해 로마서 11장 11-12절 2025.11.04 821
1170 주일말씀 찬송하라 2025.11.04 1317
1169 로마서 강해 216강 누군가를 저주하는 것에 대한 성경적 이해 로마서 11장 9-10절 2025.10.29 1900
1168 주일말씀 아벨의 제사에서 배우는 교훈 2025.10.29 3432
1167 로마서 강해 215강 하나님의 복이 저주가 된 자들 로마서 11장 7-10절 2025.10.21 7099
1166 주일말씀 형제의 연합과 동거의 아름다움 2025.10.21 12110
1165 로마서 강해 214강 엘리야를 통하여 보게 되는 하나님의 구원 로마서 11장 2-3절 2025.10.15 5577
1164 주일말씀 그리스도인 간의 관계 2025.10.15 9975
1163 로마서 강해 213강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셨는가? 로마서 11장 1-2절 2025.10.07 5145
1162 주일말씀 찬송을 위해 지음 받았다는 의미 2025.10.07 9449
1161 주일말씀 야곱의 씨름의 본질 2025.09.30 12794
1160 주일말씀 맡은 자들과 충성 2025.09.30 13472
1159 로마서 강해 211강 듣고 알고도 믿지 않음 로마서 10장 18-19절 2025.09.17 9289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79 Next
/ 79

차타누가 열린교회 CHATTANOOGA YEOLIN PRESBYTERIAN CHURCH
1622 HICKORY VALLEY RD. CHATTANOOGA, TN 37421
담임 : 박경호 목사 Ph : 423-645-7910 Email : pkrain1@gmail.com

abcXYZ, 세종대왕,1234

abcXYZ, 세종대왕,1234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