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com/live/CoRmbn-o760
오늘은 사랑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명령
속에서 주어짐으로 인해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을 두 개로 나누어 요약된다고 성경은 가르치는데 우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에 무조건적인 반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강조하는 것은 성경이 사랑하라는 명령이 주어진 배경을 모르는 것이며, 둘째로는
어떻게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까지 나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사랑하라고 할 때에 이는 인간 본성에 속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방식이나 정도로 사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예를 들어 보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는
사랑이 인간의 전 인격적 행동으로 드러나야 함을 의미합니다. 즉 정서적인 사랑의 감정이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는 말도 그와 같습니다. 희생을
각오하고, 손해를 각오하고, 내 생명을 각오하는 이웃 사랑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요구는 인간 본성에 적합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에서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즉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으며, 본질적인 새로움 속에서 나오게 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우선 마태복음 5장
46-47절을 보면 [마 5:46-47]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If you love those who love you, what reward will you get? Are not
even the tax collectors doing that? And if you greet only your own people, what
are you doing more than others? Do not even pagans do that?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에서 두가지 질문을 던지면서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데 그 첫째로는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죄인이라고 여기는 세리들도 이같이 하기 때문에 너희의 사랑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둘째로는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도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라고 묻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도 이같이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더 함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며, 이것이 질적인
차이를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합니다. 그러한 것은 예수님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세리들도 그와 같이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더함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 더함을 요구 하시는가
하면 그래야 인정을 받으며 옳다 함을 얻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상이라는 표현으로 사랑에
상이 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병행 구절인 누가복음 6장
32절을 보면 [눅 6: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If you love those who love
you, what credit is that to you? Even sinners love those who love them.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고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그것으로는 칭찬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칭찬은 누구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즉
내가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교회 안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섬기고 누군가에게 잘한다고 해도 그것이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기 때문이라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상이 없으며, 이방인들이하는 것과 같은 행위를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죄인들과 같은
일을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다름도 없고 어떠한 질적인 차이도 없는 것입니다. 즉 아무것도 아닌 자기가 좋아하는 하는 행위일 뿐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사랑에 칭찬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칭찬은 카리스 라는 단어로 은혜라는
단어입니다. 즉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뒤에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더하는 사랑 즉 나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나에게 문안 하는 자에게만 문안하지 않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사랑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방법으로 제시되는 것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며, 나를 미워하는 자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의 질적인 다름과 차이는 내가 그렇게 해야지 라는 것으로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라고 지칭하는 자들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들은 이방인이 아닙니다. 이들은 제자들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불리는 자들,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여기는 자들에게 너희는 그렇게 사랑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방인의 사랑을 뛰어넘는 질적 차이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요구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질적 차이가 어떻게 일어나게 되는가 하는 것을 잘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 7장 36-50절의
내용 속에서 그 중심에 있는 한 여인으로부터 입니다. 이 내용들은 도유사건 이라는 불리우는데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것입니다. 우선 누가복음 7장 36절을 보면 [눅 7: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When one of the Pharisees invited
Jesus to have dinner with him, he went to the Pharisee's house and reclined at
the table.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였고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다음절인 37-38절을 보면 [눅
7:37-38]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A
woman in that town who lived a sinful life learned that Jesus was eating at the
Pharisee's house, so she came there with an alabaster jar of perfume. As she
stood behind him at his feet weeping, she began to wet his feet with her tears.
Then she wiped them with her hair, kissed them and poured perfume on them.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 뒤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붓습니다. 이
상황을 그려보면 여인이 예수님의 앞이 아니라 뒤에 그 발 곁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웁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이미 이 여인으로 울면서 그 집에 들어왔고 울면서 예수님 뒤에 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실 정도로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눈물로 젖은 예수님의 발을 자기 머리털로 닦고 있습니다. 그 후에 그녀는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었고 향유를 그 발에 붓습니다. 우리의 궁금증은 이 여인이 어째서 이렇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우는가, 왜 자신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로 그 발을 씻고, 향유를 그 발에 붓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죄를 지은 한 여자가 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lived a sinful life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글 성경은 그 여자가 죄를 지은 한 여자라는 표현으로 죄인인 여자 라고 즉 죄를 지은 여자 지금도 그 죄 가운데 있는 여자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영어 성경은 그 여자가 죄를 짓고 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죄를 짓는 삶을 살았던 여자입니다. 지금은 아닌 것입니다. 이 여자에게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 여인이 죄를 짓는 삶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그녀는 죄인이었으며,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여인의 변화에 영향을 준 분은
그녀가 울며 다가가 눈물로 발을 적시고, 눈물로 젖은 그 발을 그녀의 머리로 닦고 향유를 붓고 있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녀는 자신을 죄에서 건져 내 주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눈물을 흘린 것이며, 자신을 구원하심에 대하여 감격에 겨워 눈물로 자신의 주인이신 그분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인의 행위를 지켜보던 예수님을 청하였던 바리새인 시몬이 이렇게
그의 마음에 생각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7장 39절을 보면 [눅 7: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When
the Pharisee who had invited him saw this, he said to himself, "If this
man were a prophet, he would know who is touching him and what kind of woman
she is-that she is a sinner." 시몬은 마음속으로 예수님께서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고 저지했을 텐데 모르는 구나. 어찌 죄인이 자신의 몸을
만지는 것을 허락하는 것일까 하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몬의 생각을 아시는 주님께서 시몬에게
예를 들어 질문을 합니다. 누가복음 7장 41-42절을 보면 [눅 7:41-42]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Two people owed money to a certain moneylender. One owed him
five hundred denarii, and the other fifty. Neither of them had the money to pay
him back, so he forgave the debts of both. Now which of them will love him
more?"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 둘이 있는데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다면 둘 중에 누가 그 빚 주는 자를 더 사랑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물음은 당연한 답변을 낼 수 밖에 없는 질문입니다. 당연히 더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자 입니다. 시몬 또한 그렇게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대답이 옳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7장 44-46절을 보면 눅 7:44-46절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이 여자를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네 집에 들어올 때는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시몬은 당시에 일반적으로 하는 일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단지 자신의 집에 초대를 한 것이지 해야 될 기본적인 예의 조차 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너는 내게 입맞추지도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초대한 손님에 대한 기본적인 것조차 그는
예수님께 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예수님이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시몬은 예수님의 머리에 값싼 감람유도 붓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인가에 대하여 47절 말씀을 보면 [눅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Therefore, I tell
you, her many sins have been forgiven-as her great love has shown. But whoever
has been forgiven little loves little." 왜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가 시몬과 여인이 다를까에
대하여 예수님의 답변은 이 여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그것을 알 수가 있는가
하면 이 여인의 사랑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주의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이 여자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녀의 죄가 용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녀의 많은 죄가 사하여진 이유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녀의 많은 죄가 사하여 진 것을 확실하게 증명해 주는 것이
바로 그녀의 사랑이 많음입니다. 사랑의 많음은 그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무엇으로 내가 죄 용서 함을 받았는지를 신자가 확신하게 되는가 하면 내 안에 사랑이 많아 짐을
인하여 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죄를 사함받았기 때문입니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를 힘쓰게 됩니다. 그 이유는 내 죄가 많은 사함 받았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서 나를 구원하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님의 은혜 때문에 내가 원수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 복음에서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느냐, 무슨 칭찬이 있느냐 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무슨 상과 무슨
칭찬이 있느냐? 라는 말씀은 사랑하면 상을 받고 사랑하면 칭찬을 받는 문제가 아닙니다. 무슨 상이 있겠느냐 라는 질문에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는 자에게는 아무런 상도 없고 아무런 칭찬도 없습니다. 이유는 그는 상을 받지 못하고 칭찬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상을 받고 칭찬 즉 은혜를 받은 자만 사랑합니다. 이 여인이 받은
상은 구원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이제야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녀가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죄인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녀는 상을 받아 더 많이 사랑하게 된 것이며, 은혜를 받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명령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러한 의미로 행하여지게
되는 것이며, 오직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심을 받은 신자만이 이기적이지 않게, 육신을 따르지 않고 신실하고, 진실한 사랑을 하나님과 이웃에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죄 사함을 받은 증거이기 때문에 반드시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이는 이와
같은 사랑을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