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영상
닉 부이치치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2013년에 이 사람이 쓴 책이
있는데 이름이 닉 부이치치의 플라잉이라는 이름으로 두란노에서 발간되었습니다. 미국 책 제목은 unstoppable로 막을수 없는 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닉
부이치치는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의 유명함은 그가 신체적으로 연약함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두 손도 무릎이하의 발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역경을 딛고 일어난 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그를 통하여 소망을 보고 희망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하는 집회에 사람들이 그의 희망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 몰려 듭니다. 이 책은 그가 결혼 후에 아들을
낳고 나서 쓴 책입니다. 이 책은 간증집으로 분류가 되어 두란노서원이라는 기독교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을 소개하는 내용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생의 문제에 사로잡혀 고통받고 있으면 미래와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 세상의 중력은 우리를 환경과 상황의 노예가 되게 한다. 인생에는
보이지 않는 날개가 있다. 이 날개는 행동으로 옮길 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수렁의 바닥에서는 도무지 비전과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날개가 있지만
사용하지 않고 있는 분들, 현실에 막혀 날개를 접은 분들, 세상에
의해 날개가 꺾인 분들, 이들 모두 한계를 뛰어넘어 영혼의 비상이 필요하다. 믿음의 날개를 달고 세상의 중력을 거슬러 박차고 날아올라야 한다. 닉
부이치치야말로 이 땅의 중력을 거부하고, 하늘 높이 날아 오른 믿음의 인물이다. 이제 좌절과 절망, 자기 연민을 딛고 우리가 힘차게 날아오를 차례다. 믿음을 행동으로 옮길 때만, 우리는 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 글에서 무엇을 느낍니까? 무엇이
읽혀지십니까? 이 글의 마지막 말미에 믿음의 날개를 달고 세상의 중력을 거슬러 박차고 날아올라야 한다. 라고 말하니까? 이 글이 마치 신앙을 이야기하고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또한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라는 말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된다고 이야기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체의 문맥을 보면 이 내용은 신앙이 아닌 세상의 희망과 세상의 소망을 노래하며
기대하며 사모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청중은 인생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입니다. 또한 고통받고 있으며 미래와 비전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인생에는 보이지 않는 날개가 있다고 합니다. 이 날개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면 행동으로 옮길 때만 자신이
날개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현실에 막혀 날개를 접고 세상에 의해 날개가 꺾인 자들에게 영혼의 비상을 위해 행동함으로 자신에게 있는 날개를 펴서 날아 오르라는
것입니다. 성공하는 인생이 되라, 당신이 원하는 것이 되라, 얻고자 하는 것을 얻으라. 그렇게 되리라고 믿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닉 부이치치 처럼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책이 기독교 출판사가 아닌 다른 출판사에서 나왔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두란노라는 기독교
출판사에서 출간하였으며 이렇게 신자들에게 책을 소개 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이런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사는 것이 신자가 누리는 복이며 삶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기독교의
수준이고 현실입니다. 신자는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역경을 이겨내고 현실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승리라는 것은 잘되는 것이고 하고 싶은 것 원하는 것을 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라고 정의됩니다. 현재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듣고 싶어하고 알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신자를 보호하시는가? 어떻게
도우시는가? 그럼으로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더 복되며 잘되는 삶을 살수 있을까? 반대로 오늘날 신자들에게 매력 없는 말씀은 하나님의 진노나 심판이나 지옥과 같은 단어들입니다. 마치 구원 받은 신자에게는 더 이상의 심판이나 하나님의 진노나 지옥이라는 단어는 의미 없어 진 것처럼 생각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으면 이제는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정죄하거나 어떤
것으로도 우리가 정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으로 말미암아 얻어진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의롭게 된 자에게 있어서 더 이상의 심판이나 진노나 지옥과 같은 이야기는 필요
없거나 혹은 거리가 먼 이야기가 되는가? 란 질문에 우리는 어떠한 대답을 해야 할 까요? 오늘날 이와 같은 생각이 보편적입니다.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죄에
대한 것은 불신자들에게나 전해야 하는 내용이며 심판에 대한 말씀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지옥이라는 것도 더 이상 신자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들어야 할 내용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나 심판이나 지옥과 같은 내용들이 구원 얻은 자들에게 이제 필요 없는 것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별로 듣고 싶지 않는 내용들을 불신자에게만이 아니라 오히려 신자들에게 지속적으로 말씀하고
있으며 신자나 불신자나 예외 없이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말씀이라고 증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예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그 대표적인 예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마태복음 5장 29절에서 [마 5: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If your right eye
causes you to stumble, gouge it out and throw it away. It is better for you to
lose one part of your body than for your whole body to be thrown into hell.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합니다. 실족케
한다는 말은 죄를 범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른 눈이 자신을 죄짓게 하면 그 눈을 빼어 내버리라고 합니다. 원문에는 왜냐하면 이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눈을
빼어 내버리라고 하시는가 하면 왜냐하면 이것이 네게 유익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 쪽을 눈을
잃어 버리는데 유익하다고 합니다. 잃어버리는데 유익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설입니다. 유익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얻는 것에서 발생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잃어야 유익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죄는 잃어 버려야 본문에서는 잘라 내어서 자신의 몸에서 떨어내며 분리시켜야 유익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하나 잃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시는데 어디서 실제적인
유익이 드러납니까? 그 드러남은 온 몸입니다. 여기서 눈
하나는 온 몸과 비교되고 있는 것입니다. 눈 하나를 잃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인간에게 눈이란 딱 두개 뿐입니다. 만약 치아를 하나 잃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 보겠지만 눈이라는 것은 정말 중요한 기관이기에 잃는 다는 것은 아까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눈을 아낌 없이 포기하며 버릴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온 몸입니다. 눈 하나와 온 몸은 비교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눈이
아까와도 온 몸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눈 하나를 살리기 위해 그 눈이 포함된 온 몸이 죽기 때문입니다. 온 몸을 잃는 다는 것은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운다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온 몸을 잃게 되는가? 그 몸이 지옥에 던지올 때 그는 그의 한 몸이 아니라
전체를 잃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신자에게는 상당히 부담이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신체 중 중요한 한 지체를 잘라내 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사실임을 인식하고 자신의 영혼을 귀히 여기며 온 몸을 구원하고자 하는 자 만이 말씀을 실천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실천한다는 것은 자신의 눈을 빼내는 것이거나 자신의 손을 잘라는 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대하여 철저하게 다루고 있는가? 죄에 대한 방관과 방조와 무관심이
어떤 결과를 초래 할 것인가에 대한 경고입니다. 죄를 짓고 죄 아래 거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대하여
아무런 저항이나 싸움이나 잘라 내는 아픔이 없는 자는 결국에는 지옥에 던져 진다는 말씀입니다. 죄를
무시하며 가벼이 여기며 죄와 동거하는 자는 그 죄와 함께 지옥에 던져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 우리 안에 죄를 없이 하는 일에 매진하여야 합니다. 죄와의 싸움은 거룩함을
우리 안에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얻게 되는 힘을 공급받아 의롭게 되며 거룩하게 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입니다. 예수의 성품을 닮아가려 애쓰며 그분의 인격을 배워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우리가 생각 보아야 할 또 다른 문제는 이 말씀이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며 또한 오늘 신자된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되어져야 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죄를 깨닫고 자신의 죄를 위해 눈이나 손을 잘라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신자만이
스스로를 돌아 보아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죄를 죽이는 일에 헌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된
자가 만약 자신의 죄를 방조하며 죄와 짝하며 죄에 대한 무지하며 무기력하다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옥에 던져 진다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당황스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유는 예수님께서 죄에 대하여 심각성을 가지고 죄를 끊어 버리며 죄를 잘라내지 않는 자는 지옥에 던져 진다고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혼란스러우며 무엇이 당황스러운가 하면 신자가 지옥에 던져 질 수
있는가 하는 물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자의 구원은 취소될 수 있는가?
혹은 구원은 불완전한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을 보겠습니다.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And this is the will of him who sent me, that I shall lose none of
all those he has given me, but raise them up at the last day. 또 다른 구절을
봅시다. 마태복음 24장 24절을
보면 [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For false messiahs and false prophets will appear and perform great
signs and wonders to deceive, if possible, even the elect. 마지막 한 구절을
더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7-28절을 보면 [요
10:27-28]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이 구절들이 증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구원은
취소되거나 무효가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라는 말씀이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영생을 주신다고 하시면서 어떻게 그 영생 할 수 없거나 영생하지 못하게 됩니까? 영생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것이 중간에
없어지거나 사라지거나 무효화 된다면 그것은 영생이 아닙니다. 영생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중간에
취소되거나 사라지거나 무효화 되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지옥에 던져진다고 하십니까? 문제는 주님이 주시는 구원이나 영생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소유했다는 자들 안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회심하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정말로 그들이 가진 믿음이 진짜인가? 하는 것입니다. 중생을 하거나 회심하게 되는 것은 믿는 것의 출발점이며 시작점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이라는 것이 중생이나 회심을 통하여 시작되고 출발하는 것이나 끝이나 완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참으로 중생하거나 회심한 자들의 특징은 그들의 믿음을 통한 삶이 지속되며 계속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에 구원을 받을 때에 그랬던 것처럼 동일하게 오늘도 그리스도께 의존하고 내일도 그리스도께 의존하는 삶을 삽니다. 그들의 이런 의존은 그들 자신의 무력함을 지속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죄를 깨닫고 돌아설 수 있도록 은혜를 구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내어 맡기는 일을 계속해 나갑니다. 그러나
반대로 참된 중생이나 회심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것이 잠깐이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때에 감정적 충동이나 동기로 인해 그러한 것을 시도하지만 지속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에 던져 진다는 것은 이런 상태에 놓여 있는 자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자신의 눈을 빼어 내는 것이나 손을 잘라 내는 것과 같은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죄를
죽이는 일에 힘을 다하지 않는 자는 중생이나 회심을 경험하지 못하였기에 지옥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중생과 회심을 경험한 자들은 죄 죽이는 일에 평생을 바쳐 싸운다는 것입니다. 참된 구원을 얻은
신자는 죄를 미워하며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됩니다. 죄를 지음으로 인한 슬픔이 무엇인지를 알며
그 죄를 없이 하고자 발버둥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도함으로 성령을 통하여 죄를 이길
능력을 소유하게 되며 말씀으로 자신을 무장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참된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그 모든 일에 거부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슬퍼하며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할 뿐만 아니라 그 죄의 자리를 떠납니다. 왜냐하면 그의 영혼이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진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네가 참으로 구원을 받은 자인가 너의 중생은 참이며 너의 회심은 진심인가? 무엇으로 확인됩니까? 잘라내는 것입니다. 눈을 뽑아 버리고 손을 잘라버리는 것과 같은 죄를 죽이고자 하는 처절한 싸움이 우리의 심령 안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지옥에 던져질 자입니다. 존
오웬은 죄 죽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죄를 죽이는 것을 당신의
매일의 일로 만드는가?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항상 그렇게 했는가? 이
일을 단 하루도 멈추지 않았는가? 죄를 죽이지 않으면 죄가 당신을 죽일 것이다" 죄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죄를 끊어내지 않으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진다는 말씀을 가볍게 듣지 마십시오.
죄와 싸워야 합니다. 죄를 짓는 순간 우리는 지옥에 던져 지는 것을 상상해 보아야 합니다. 지옥에 던져짐은 왜 우리가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 지에 대한 강력한 동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