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com/live/b7z-PTdbVns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복음 5장 44절을 보면 본문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널리 알려진 말씀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본문의 말씀을 듣게 되면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는 막연한 부담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도 사랑하라는 단어가 명령형입니다. 더욱 이 말씀이 부담이 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단회적인 사랑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단회적이 아니라는 것은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사랑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랑의 대상이 우리가 사랑할 만한 대상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원수라는 단어는 미워하다라는 단어에 기원합니다. 그래서
미워하는, 적의에 찬 사람 또는 증오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런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요구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44절에서는 이들이 박해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박해 한다는 단어의 의미는 어떠한 방법으로든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자입니다. 그것도 의도적으로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말입니다. 이렇게
나를 박해하는 자들을 어떻게 사랑하며 이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할 수가 있겠습니까? 결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말씀을 받을 때 잘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이런 어려운
일을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리하게 요구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원수 사랑과 핍박하는 자를 위한
축복의 기도가 중심 내용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뭔가 특별한 사람으로 보이고 존경 받을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이 감히 할 수 없는 존재로 비추어지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을
읽으면 이 부분이 좀더 정확해 집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의 기도를 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설명합니다. 45절은 그렇게 하는 자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잘못 오해하면 안됩니다. 아들이
되리라 라는 말씀은 원수 사랑 핍박자를 위한 축복 기도를 해야만 아들이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되리라의 의미는 아들로써 인정되거나 증명 되어진다는 차원의 의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아들로써의
증명이라는 것은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누구의 아들인가
하는 부분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아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좀더 의역을 하면 너희가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축복하며 기도하면 이것은 너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아들이 되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게 됩니까? 바로 아버지를 닮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에 대응하여 그들을 취급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또 오해하면 안 되는데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지 않고 잘못해도 그냥 복을 주시는가 하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일반 은총 즉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라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의 삶에 대하여 분명히 하나님은 종말의 때에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하나님은 지금 자신을 향하여 반역하는 자들을 향하여 그들의 모든 필요를 빼앗아
가셔서 햇볕도 비도 없는 삶을 살도록 하시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은혜를 베푸시는 자비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그분을 닮은 자녀들은 그분을 닮아 살게 됨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삶을 살게 되어 동일하게 원수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 인하여 그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내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닮은 자들이라는
것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으며, 시행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이러한 용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21-22절을 보면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 라고 합니다. 여기서 너희는 세상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로 골로새 교인들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습니다.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다는 말은 마음으로만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부터 즉 모든 행위의 근원인
마음까지도 하나님을 원수로 여기며, 하나님을 대적하며, 거역하며
살았던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를 자신의 아들을 육체의 죽음으로 자신과 화목하게 하신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을
보면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 즉 죽음을 통하여 우리와 화평을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마음으로 원수된 자로 조금도 회개하거나 돌이키거나 뉘우칠 기미가
전혀 없는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려고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원수 사랑은 우리의 아버지를
닮는 차원으로의 요구이며 아들로써의 요구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세상 사람과 달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만 사랑하는 세리와 달라야 합니다. 또한
우리 형제에게만 문안함으로 이방인과 같지 않습니다. 더 나은 높은 수준을 이루어야 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요구되는 것이 바로 원수 사랑입니다. 원수 사랑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증명해 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하늘에 계신 전능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고 있으며 나는 그분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그것 때문에 나는 오늘 나의 원수를 맞이합니다. 그것
때문에 나는 오늘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그것을 증명해 내기 위해서 오늘 나는
그들을 위하여 손을 들고 축복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의 어떤 의로움이 이 일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능력이나 인내나 나의 사랑이 원수 사랑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바로 그분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 마태복음 5장
47절은 이것을 더욱 확실하게 합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온전하다라는 말은 완전하여 흠이 없이
결점이 없는 자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은 성숙하라는 뜻입니다.
어디까지 성숙해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성숙에까지 이르러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다는 의미가 바로 이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까지 자라야 하는 요구가 바로 이 말씀입니다. 원수 사랑은 원수가 불쌍해서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나의 의지와 노력을 인내와 사랑의 넓이를 시험하는 의미도
아니며 오직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또한 그분을 닮은 자임을 증명하는 차원으로써의 요구이기에 우리는 힘들더라도 어려워도 모멸감과 모욕과 비굴하게
보일찌라도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모시고 있기
때문이며 내가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창피할 수도 있고 무시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나를 아들로 인정하신다면 우리는 참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아버지 때문입니다. 내가 그분의 자녀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용서를 가능하게 하며, 기도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