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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com/live/OJv-kXfhGVA


룻기의 기록 목적과 의도를 알아야 룻기를 제대로 읽고 해석할 수 있는데 목적과 의도는 무엇인가? 인가 하는 부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룻기의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대부분 책의 이름이 룻기이기 때문에 룻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량면에서 룻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고 스토리 조차도 룻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분량이 많다고 해서 주인공이 아닙니다. 주인공은 전체의 이야기속에서 주제의 흐름이 누구를 통하여 흐르는가 입니다. 룻기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인물은 룻이 아닌 나오미 입니다. 룻기의 처음은 엘리멕렉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곧 모든 사람들은 누구를 중심으로 설명이 되는가 하면 나오미 입니다. 그래서 룻기 13절을 보면  엘리멜렉은 가장임에도 나오미의 남편으로 그리고 두 아들은 나오미의 아들로 그리고 뒤 이어 나오는 말씀에서는 며느리들은 나오미의 자부로 나오미에 속한 자들로 소개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룻기의 핵심인물은 룻이 아닌 나오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자는 핵심인물인 나오미를 통하여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가 입니다. 이것이 기록 목적과 의도입니다. 룻기의 처음 시작은 핵심인물인 나오미에게 어떤 일들이 발생했는가로 시작합니다. 나오미는 사사들이 다스리던 시대의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인데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에브랏은 농사짓기에 기름진 땅이었기에 그 땅에 기근이 들었다는 것은 그 기근이 얼마나 심한가를 알게 합니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남편은 모압 땅으로 갔는데 이곳은 모압 평지입니다. 이곳으로 간 것이 신앙을 버린 것으로 오해할 수 없는 것은 1절을 보면 우거라는 말이 완전히 그곳에서 살려고 갔다는 말이 아니라 잠시 머물다 라는 의미이기에 그는 극심한 기근을 피해 잠시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 모압 평지로 갔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그만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그곳에 죽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두 아들은 그 땅에서 장가를 들게 되었으나 결국 그들도 자식을 얻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이때가 베들레헴을 떠나 온지 약 10여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이제 저자는 나오미가 남겨진 여자인데 두 아들의 뒤에 남겨진 여자 즉 아들들을 잃어버리고 남겨진 여자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저자가 이런 뒤에 남겨진 여자라는 표현을 쓰는가 하는 것은 저자의 의도입니다. 이 글을 읽는 자들이 이 본문을 그렇게 읽고 이해하라고 의도한 것입니다. 나오미는 철저하게 잃어버리고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이 홀로 남겨진 여자라는 것입니다. 고향과 그의 집은 떠나 올 때 잃어버린 것입니다. 흉년이라는 고통이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보금자리를 잃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고 낯선 이국 땅에서 그녀의 남편 엘리멜렉을 잃어버립니다. 결혼한 여자에게 있어서 남편은 오늘날과 같은 구박덩어리나 골치덩어리가 아닙니다. 당시에 아내에게 있어서 남편은 현재의 삶에 대한 보호자이며 보장이며 소망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여자를 숫자에 넣지 않는 이유는 당시에 여자에 대한 사회적 이해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낮은 지위 때문입니다. 고대에 사람의 지위와 가치를 인정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기준은 노동력과 그로 말미암는 생산성입니다. 얼마나 일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므로 많은 생산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사람의 척도이었기 때문에 여자들은 사회적으로 약자로 취급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자신을 방어하거나 지킬 수 있는 강한 힘이 그 기준이었기 때문에 여인들은 스스로를 방어하거나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의 차원에서 약자였습니다. 그렇기에 당시에 여자들은 어려서는 아버지의 보호아래 그리고 결혼해서는 남편의 보호아래 그리고 남편 사후에는 자녀의 보호아래 놓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고향이라는 과거를 잃어 버렸고 현재라는 남편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노후를 보장해줄 두 아들을 잃고 말았기에 그녀는 미래를 상실한 것입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이제 홀로 남은 것입니다. 어떤 분은 그녀에게 두 며느리라 있지 않는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 며느리 조차도 그녀에게는 자신과 똑같은 처지에 놓인 자들 밖에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녀들 역시 당시의 약자인 여자라는 사실입니다. 남자와 같은 노동력이나 보호의 능력을 소유하지 못한 여자 셋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을 나오미는 너무나 잘 알기에 두 며느리들에게 돌아가라고 청원하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그녀의 두 며느리들에게 하는 말을 보면 자신은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두 며느리는 아직 소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룻기 112-13절을 보면 너희는 너희의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서 새롭게 시집을 가서 새로운 남편을 만남으로 너희들의 미래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가라고 합니다. 이에 오르바는 떠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오미의 모습은 스스로 자신의 현재의 상태를 표현하는 20절에서 잘 드러납니다. 룻기 120절을 보면 이 말은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올때 사람들이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 한 말입니다. 그녀의 이름이 나오미 입니다. 나오미의 뜻은 "우리의 즐거움" 이라는 뜻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삶에서 즐거움이 떠났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을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라고 합니다. 이유는 그녀에게서 즐거움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녀의 현재의 삶을 잘 대변해주는 단어로 자신의 이름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그 이름이 마라입니다. 마라란 쓴 이라는 뜻입니다. 그녀는 더 이상 즐거움이 아닌 쓴 사람이 되었기에 그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다음절인 21절을 보면 이 절에서 그녀가 어떻게 우리의 즐거움에서 이제 쓴 사람이 되었는가를 표현하며 내가 풍족하게 나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여호와로 말미암아 이제 비어진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생각 할 것은 하나님께서 나오미의 인생을 치셨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룻기의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하여 나오미가 범죄하였거나 누구의 잘못이나 악함이나 범죄의 결과로 이런 일을 당하였다고 전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오미의 고백에서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였고 나를 괴롭게 하셨다는 말을 나오미의 범죄의 결과로만 이해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또한 뒤에 나오는 나오미의 회복은 그녀의 회개를 전재로 한 것이 아님을 볼 때에 나오미의 고통이 그녀의 범죄의 결과로 온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오미는 왜 여호와 하나님을 그녀의 고통의 근거로 표현하고 있는가 하는 부분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주권에 대한 이해로부터 나오게 되는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은 기쁨은 물론이고 고통도 그분의 허락으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이해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고통을 조장하거나 의도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허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신자의 신앙에 유익을 주고 하나님을 소망하도록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바로 나오미의 말에 담긴 의미입니다.

        신자의 삶에서 닥치는 문제는 범죄의 결과로써 맞이 할 수 밖에는 하나님의 책망과 벌로써 주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이나 절망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나오미 처럼 풍족한 인생이 텅빈채로 남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룻의 주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신자가 인생을 살면서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이나 아픔이나 슬픔이나 어려움을 당할 때 이러한 어려움과 고통에서 어떻게 벗어나면 인생의 쓰디쓴 고난과 어려움은 어떻게 극복이 되며 텅빈 그녀의 인생은 그냥 그렇게 끝이 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룻기는 여기에 답을 줍니다.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텅빈 한 인생을 위하여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녀를 위해 여전히 준비하시며 그녀를 기억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삶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절망에 놓일 때에 인생의 끝자락에 서 있을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도우시는가? 그분은 어떻게 우리의 텅비어버린 삶을 채우시는가? 그분은 분명히 일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텅빈 신자의 삶이나 절망에 빠진 신자의 삶에 역사하시는 것을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생각하며 그렇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능력으로 갑자기 부자를 만들어주시거나 문제를 일 순간에 해결해주시는 방법을 기대합니다. 이와 같은 기대처럼 하나님께서는 일순간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도 하십니다. 마치 기도하면 그 기도 한대로 딱 들어맞게 역사하시기도 하십니다. 5만번의 기도응답을 받았던 조지 뮬러와 같이 정확하게 필요한 돈을 받기도 하고 정확하게 고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대부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은 그러한 방법이 아닙니다. 룻기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오미의 인생에서 그녀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며 위로자들을 보내시고 그녀의 인생을 다시 회복하셔서 쓰디쓴 그녀의 인생에 다시금 웃음을 주시고 행복을 주시며 또한 그의 이름인 즐거움을 회복하십니다.

        이에 대하여 룻기 212절을 보면 이 말은 나오미의 친척인 보아스라는 사람이 나오미의 며느리 룻이 자기 밭에서 곡식 낱알을 줏을 때에 그녀를 만나 룻에게 한말입니다. 룻아 여호와께서 네게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텅빈 나오미의 인생은 그의 며느리 룻을 통하여 채워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보아스를 통하여 룻과 나오미의 인생을 채우시는데 여기서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라고 합니다. 보아스는 룻의 모습이 마치 새끼 새가 어미 새의 품 속으로 품어 보호함을 얻는 것처럼 룻이 하나님의 품에 들어오니 하나님께서 그분의 날개로 보호하시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룻의 답변이 룻기 39절에서 이렇게 기록되고 있는데 룻이 말하기를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인이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보게 되는 것이 당신의 옷 자락을 펴서 라는 단어가 카나프 라는 히브리어로 날개라는 뜻입니다. 앞서 보아스가 룻에게 여호와의 날개 아래 라고 할 때에 사용한 단어가 바로 카나프입니다. 즉 하나님의 날개 아래서 보호 받기를 원한다는 말에 룻은 바로 당신이 그 하나님의 보이는 날개가 되어 나를 덮으실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바로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라는 말입니다.

        이에 보아스는 자신의 날개로 그녀를 덮고 나오미를 덮어 그들의 삶의 텅빈 부분을 채워줍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분의 자녀들 간의 충성입니다. 룻기 222절을 보면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은혜라는 단어가 바로 헤세드입니다. 즉 신실한 사랑이며 충성을 다하는 사랑이며 인애 입니다.

        여기서 초자연적인 능력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전능하신 그분이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일순간에 그녀의 삶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초라한 그리고 나오미와 같이 소망이 없는 이방여인 룻을 들어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녀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고 하나님을 찾으며 구하게 하셨습니다. 그녀의 마음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서로 돌보며 베풀며 살아야 하는가 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룻의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인 인애를 주신 것입니다. 인애는 강자가 약한자를 향한 무조건적인 충성이며 헌신이며 사랑이며 베품이며 도움입니다. 자신 조차도 아무것도 아닌 룻의 마음에 인애의 마음이 부어지자 그녀는 그녀의 시모를 떠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위해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초자연적인 역사로 자신의 백성들 가운데 역사하시기 보다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그분의 은혜를 경험하며 그분의 인애를 알고 깨달은 자들로 하여금 그 인애를 서로 나누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애가 서로에게 부어지고 전해지고 나누어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종의 차별이 없습니다. 또한 부유함이나 가난함의 차이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강한자나 약한자의 나뉨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마음 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들이 서로를 돌보며 의지하며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약한자를 세우시며 그들의 텅빈을 채워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서로를 위하여 주셨음을 기억하십시오. 고통을 들어주고 받아주고 함께 안아주고 도와 주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며 하나님께 우리가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른 어떤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며 뜻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며 서로의 빈 것을 채워주며 돌보아 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내 몸과 같이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어떻게 저들의 기쁨이 되어 저들을 회복할 수 있을까? 고민하시고 그 기쁨이 되도록 애쓰십시오. 이것이 신앙입니다.


주일 말씀 요약 및 설교 영상

주일 말씀 컬럼 안에 설교 영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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