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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말씀
2024.02.29 11:13

너의 아버지의 복들

YC
조회 수 3692 추천 수 0 댓글 0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야곱의 축복으로 잘 알려진 본문입니다. 28절을 보면 야곱이 그의 아들들을 축복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야곱의 축복이지만 사실은 야곱 개인의 주관과 소망에 따른 축복이 아닙니다. 이것은 야곱의 아들들이 세워갈 각 지파를 향하신 하나님의 예언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49 1절을 살펴볼 때 단순한 개인적 축복이 아니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들에 대한 것임을 야곱이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르리라 라는 단어는 이야기하다 선포하다 라는 뜻도 있지만 본문에서는 예언하다 라는 의미가 더 맞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말은 지금 당장의 일들이 아니라 후일에 마주치게 될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자신의 자녀들에게 한 이 말씀들은 하나님을 통한 예언적 선언이기에 저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축복은 아닙니다. 르우벤 같은 경우에는 탁월하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시므온과 레위는 이스라엘 중에서 나누며 흩어지게 합니다. 야곱이 어떻게 자신의 자녀들에게 저주 할 수 있는가 생각하지만 이것은 예언의 성격을 선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야곱을 통한 예언적 선언 가운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요셉에 관한 내용입니다. 22절부터 야곱은 요셉의 후손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예언합니다. 야곱의 요셉에 대한 예언적 선언은 다른 지파와는 사뭇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언적 선언 만이 아니라 야곱 개인의 축복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26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창세기 4926절을 보면  이 구절에서 이 축복이 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축복은 야곱이 요셉에게 전해 주고자 하는 복인데 이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가지고 있는 축복인데 이것을 야곱은 자신의 아들 요셉에게 주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 축복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야곱이 요셉에게 한 모든 예언적인 선언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선 22절부터 보겠습니다. 창세기 4922-24절을 보면 이 구절을 보면 요셉의 후손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요셉의 후손들은 무성한 가지 입니다. 그것도 샘 곁에 있는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을 정도입니다. 열매가 많이 달린 풍성한 가지 같이 요셉의 자손은 풍성할 것입니다. 그 다음 구절은 그는 활 쏘는 자들에 표적이 되어 공격을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의 24절은 우리가 쉽게 오해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라는 구절 때문입니다.

        사실 49장 전체의 내용을 해석 할 때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유는 야곱의 예언 자체가 시적 형태를 뛰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의 형태를 뛴다는 것은 단어들이 함축적이고 문장이 함축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해석상의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24절의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라는 말을 어떤 이들은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셉의 후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라는 물음을 갖게 됩니다. 본문에서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라는 것은 구약에서 반석의 상징은 하나님도 되지만 나도다 라는 의미에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데 본문에서 나도다 라는 의미는 태어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의미는 돌본다는 의미입니다. 이 본문을 개역개정 번역으로 보면 좀더 이해가 됩니다. 요셉의 후손은 활 쏘는 자들에 의하여 학대를 당합니다. 그러나 그의 활은 굳세고 그의 팔은 힘이 있을 것인데 이유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좀더 원문을 직역하면 야곱의 전능자의 손들 이스라엘의 반석이 양을 돌보듯이 하는 것 때문에 요셉이 힘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요셉의 후손이 어려움 속에서도 견디게 되는 것은 야곱의 전능자 때문입니다. 그분이 누구인가 하면 이스라엘의 반석으로 돌보는 자입니다. 그가 누구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요셉의 후손은 지켜질 것입니다. 야곱이 예언적 선언에 따르면 요셉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힘과 능력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힘을 얻어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 말은 다음 구절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25절은 24절의 연속으로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이신 분이 어떤 분인가를 설명합니다. 창세기 4925절을 보면 이 구절은 24절의 연속으로 요셉이 힘을 얻는 것은 네 아비의 하나님으로 부터 말미암는데 그분은 너를 도우시는 분이시며 전능자로 말미암는데 그분은 네게 복을 주시는 분이시며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야곱이 요셉을 축복합니다. 그런데 이 축복은 자신에게 나오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22절부터 그 내용을 보십시오. 그는 요셉을 축복하면서 한번도 자신의 이름으로 축복하지 않습니다. 누구의 이름으로 누구를 근거로 해서 축복합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축복의 근거이며 그분이 모든 축복의 원인이십니다. 야곱은 요셉의 후손을 하나님의 축복에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며 돌보실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축복은 다른 어떤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렇기에 야곱이 하나님을 통하여 그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24절과 25절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모든 것은 그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서술하는 설명에 불과합니다.

        돕는 손들이나 양을 돌보듯 하는 것이나 너를 돕는 자라는 것이나 하늘의 복과 깊은 샘의 복이나 젖먹이의 복이나 짐승의 새끼 배는 복은 하나님을 설명하는 서술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누구시냐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26절의 야곱의 복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창세기 4926절을 보면 26절에서 야곱은 자신의 복이 자신의 부여조 즉 조상들 보다 나아서라고 하는데 나아서라는 말은 우월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야곱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 야곱이 받은 축복이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받은 복보다 더 우월한 것인가 하는 것이 증명되어야 합니다. 야곱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자신의 아들 요셉에게 주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요셉의 머리 위에 놓여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받은 축복이 어떤 것입니까? 어떤 것이 길래 아브라함과 이삭보다 크다고 합니까? 우리는 이 본문을 볼 때 25절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봅니다. 하늘의 복들과 아래로 깊은 샘물의 복들 젖먹이는 복들과 짐승의 태의 복들 즉 세상적인 물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자신의 선조보다 더 우월한 복을 받았다는 것이 사실인가를 성경을 통하여 확인해야 합니다. 거부 혹은 매우 풍부함이라는 단어를 찾아 보았습니다. 창세기 132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나왔을 때에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풍부라는 단어 앞에는 매오드 라는 히브리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대단히' 라는 부사입니다. 이삭의 경우 창세기 2613절을 보면 여기서는 이삭의 경우에는 아브라함 보다 더합니다. 거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도 히브리어 매오드 라는 대단히 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부가 엄청난 것입니다. 야곱의 경우를 찾아 보았습니다. 야곱의 경우에 거부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창세기 311절을 보면  야곱이 들은즉 라반의 아들들의 말이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 하는지라 여기서 거부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이 증명으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라반의 아들들의 시기 섞인 표현임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원문의 의미는 이같이 풍부해 졌다는 의미이지 거부라는 의미가 압니다. 그리고 그가 하란에서 떠나올 때 두 떼를 이루었다고 하는 부분에서 그는 엄청난 거부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물질적 부유함이나 세상적 부유함은 아브라함이나 이삭의 비교가 못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의 복들을 물질적이나 세상적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야곱이 아브라함보다 이삭보다 더 나은 것 더 우월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야곱에게는 아브라함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삭보다는 견줄 없이 탁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나 하나님에 대한 앎이며 하나님에 대한 이해이며 하나님과 깊은 관계입니다. 이것 만큼은 아무도 야곱을 따라 올 수가 없습니다. 그의 인생은 험난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는 형의 발목을 잡고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형을 속여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내고 형을 피해 하란으로 떠납니다. 그는 얼마 안되어 돌아올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20년의 세월을 그곳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하란에서의 삶은 평안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삼촌 라반과의 끊임없는 다툼과 싸움이 이어졌습니다. 결국에는 그를 피해 도망치듯이 돌아와야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 또한 죽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죽이러 오는 형 에서로 인해 그는 신음하며 긴긴 밤을 보냅니다. 그의 딸 디나로 인해 자식들이 살인을 저지르고 또한 노년에 자식들이 자신을 속임으로 고난을 당합니다. 그의 인생은 너무나 험악한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생을 통하여 그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어떻게 자신의 인생에 찾아오시며 간섭하시며 만들어 가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 내가 사는 줄 알고 살아왔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내 지혜로 내 능력으로 사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는 헛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인생의 고비하마 만난 하나님을 통하여 그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 만이 인생의 주인이신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야곱 만큼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야곱이 자신의 복들이 나의 조상들의 복들 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이 이 의미입니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 내가 아는 하나님은 다른 누구 보다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24 25절입니다. 창세기 4924-25절을 보면 아브라함도 이삭도 하나님을 이렇게 수많은 수식어로 표현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경험한 자만이 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야곱이 하는 말을 보십시오. 요셉아 너는 힘을 잃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이 너와 함께 하실 것이다.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반석이시란다. 그분은 목자처럼 자신의 양들을 돌보시는 세밀한 분이셔 너를 도우시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 때문에 너는 힘을 잃지 않을 것이야 야곱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경험한 자만이 고백할 수 있는 말입니다. 네 아버지의 하나님 내가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분 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전능자 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들은 각기 다른 단어입니다. 전능자의 손에서 전능자는 '아비르' 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능력이라는 뜻으로 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을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표현입니다. 뒤의 전능자로 말미암나니에서 전능자는 샤다이 입니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엘 샤다이 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능의 하나님이라는 호칭으로 사용되는 것인데 야곱이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분이 바로 온갖 복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에 대한 풍성한 어휘가 어디에서 생겨난 것입니까? 그가 스스로 공부해서 터득한 것입니까? 아니면 누구에 의해서 가르침을 받아서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가 경험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이 풍성한 이름과 그분의 사역에 대하여 그분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복들입니다. 복이라고 하면 물질적인 것이나 세상적인 어떤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복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복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주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모든 하나님에 대한 경험과 깨달음 그분에 대한 이해들은 우리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수 많은 복들 가운데 가장 위대하며 가장 귀하며 가장 소중하며 가장 가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물질적 풍요로움은 사람을 악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쾌락을 쫓으며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는 건강은 의미 없습니다. 죄만 지을 뿐입니다. 도둑에게 건강은 악인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 없는 지식은 악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유혹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는 그 어떤 것도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가장 소중한 하나님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하십시오. 하나님을 더 깊이 아시려고 애쓰셔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하나님을 깊이 아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얼마나 더 하나님을 깊이 아는가 하는 싸움이며 그것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그렇기에 매일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훈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 하나님과 함께 하셔야 합니다.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가지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 가지고 그분을 알 수 없습니다. 그것 가지고는 온 세상을 지으신 그분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312절을 보면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마치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합니다. 당시의 거울은 청동 거울이라 희미하게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며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그분을 제대로 섬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자신의 마음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성경대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데 그분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잘못을 해도 그것이 잘못인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왜 죽었나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대로 생각대로 하나님을 섬기다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함을 얻겠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룩한 분으로 대하며 거룩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여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신앙 생활이 자꾸 무엇인가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인 양 착각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은 누구를 위함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열심과 성실함과 자발적 충성을 다하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급한 줄 압니다. 하나님이 아쉬운 줄 압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누구에게 손해 이며 누가 망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완전하시며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신 것이 그분이 뭔가 부족하거나 영광을 받을 대상이 없어서 인간이 없으면 외로워서가 아닙니다. 그분은 스스로 온전하시며 스스로 완전하시며 인간들의 섬김이 없으셔도 그들의 영광 돌림이 없으셔도 부족함이 없으시며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스스로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자발적이며 그분의 궁휼과 사랑에 기인한 것입니다. 이것을 기뻐하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망하는 것은 우리입니다. 왜 말씀을 읽고 하나님을 알아야 하며 경험해야 하는가 하면 우리에게 이것이 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자체가 우리의 삶에 축복이며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이것이 영광스러운 것이고 이것이 내게 감격이고 감동이고 말할 수 없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분의 뜻을 이룰 수도 없고 그분이 원하시는 삶도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분을 신앙 할 수가 없습니다.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믿을 수가 있으며 그분이 하시는 것을 어떻게 신뢰할 수가 있습니까? 믿음은 앎에 나오는 것이고 이해하며 경험하고 체험 함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앎은 신뢰를 만듭니다. 그리고 신뢰는 믿음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분이 자신을 정확하게 계시해 놓으신 말씀입니다. 성경을 통하여서만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함으로 그 말씀이 사실이며 진리임을 경험해야 합니다. 이것이 방법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말씀을 읽고 그것을 삶에 실천하며 그분이 정말 살아계신 분이신지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지키시는 분이신지 확인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주일 말씀 요약 및 설교 영상

주일 말씀 컬럼 안에 설교 영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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