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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com/live/bONuP4-dcwo


갈라디아서 516-17절을 보면 바울이 말하기를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합니다. 즉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의 특징으로 분별법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육체의 욕심이 성령이 내주하는 자에게 그리고 성령을 따라 사는 자의 특징으로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만으로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으며, 어떻게 내 안에 성령이 계심을 확신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17절에서 바울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기 때문이며, 이 둘은 서로 양립할 수 없이 서로 대적하는 관계로 존재하기 때문에 성령의 소욕이 나를 지배하면 내가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되고 성령을 따라 행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확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좀더 설명을 드려야겠습니다. 17절에서 성령이 육체를 거스려 우리 속에서 욕심을 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육체는 성령을 거스려 욕심을 냅니다. 그러나 성령 역시 육체를 거스려 욕심을 부립니다. 소욕이라는 단어는 강하게 소원하다, 강한 영향을 투입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를 위한 성령의 바람은 우리가 육체의 영향에서 구원받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비록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의 영혼이 거하고 있는 이 몸은 아직 온전한 구원을 받은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이 썩어질 몸이 썩지 않을 몸을 입을 때까지 즉 주님이 오시는 그날에 우리의 몸이 변화될 때까지 우리가 죽어 지금의 육체에서 벗어나기 전까지는 우리는 여전히 죄로 오염된 육체 안에 거하기 때문에 육체의 소욕이 존재하며, 우리의 육체를 통하여 죄의 욕심을 이루려는 일들이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상태 즉 영혼은 구원은 받았으나 우리의 몸은 여전히 죄의 힘이 남아 역사하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성령이 필요하며, 성령 하나님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이 여기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두 개의 소욕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오직 하나만의 소욕이 있을 뿐입니다. 즉 육체 강한 욕구로 죄가 강하게 영향력을 행사함으로 육체의 욕심에 따라 사는 삶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강한 소원과 육체의 강한 소원 이 둘이 존재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둘은 항상 서로 대적하는 관계에 있지만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육체의 소욕이 강한 만큼 성령의 우리를 향한 강한 소원 또한 더욱 강하며, 크게 역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하여 야고보서 45절을 보면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고 합니다. 이 말씀은 헛되다는 말은 효과 없이 라는 뜻으로 의미 없이 그냥 하신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효과가 있으며, 의미를 두고 하신 것이라는 점입니다. 무엇이 그렇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 하나님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바른 해석은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질투하여 시기하기까지 우리를 갈망한다는 뜻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갈망하시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갈망하시는 것은 그분은 우리가 참다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갈망하십니다. 또한 우리의 성화를 갈망하시며, 우리의 성결을 갈망하시며, 우리의 이름과 우리의 거룩한 부르심에 합당하게 되는 것을 간절히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사모하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질투하여 시기하기까지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부모이든지 그 부모라는 이름 답게 자녀의 행복과 평판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듯 또한 사랑하는 애인이 그의 사랑하는 사람의 복락과 명성을 위해서 진력하듯이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되 우리를 위하여 질투하는 시기 정도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투하는 이라는 말에서 의문을 품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 가운데서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관심이 얼마나 크며,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독점적 관심의 요소를 상기시키는 강한 표현입니다. 이러한 성령께서 우리를 사모하며 질투하심은 우리의 육체의 소욕이 아무리 크더라도 또한 강력하더라도 성령께서 우리를 향한 갈망은 이보다 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신자들은 육체의 욕심에 따라 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그리고 마귀에 대하여 싸울 수 있으며 대적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성령의 소욕이 그 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구원받은 영혼을 보하시며, 우리의 육체로 인하여 우리가 쓰러지고 넘어지지 않도록 우리를 향한 강력한 사모함과 갈망을 가지고 우리를 이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바르게 인식할 때 신자는 이러한 성령의 소욕에 자신이 이끌리도록 순종의 마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성령께 자신을 내어 드리는 일들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강력한 소욕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는 내가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다면 성령 하나님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자에게 보편적이고 전체적인 사고방식을 주심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12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다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인생에 대하여 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비교하는 첫째 요건은 이 영적인 관점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자는 신령한 일에 맛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다른 일들 가운데서 그는 그리스도인이 함께 성경을 공부하는 모임을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배를 사모하는 자이며,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고 영적 갈망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영혼과 영혼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18절을 보면 바울은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입니까? 참된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는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입니다. 그는 보이는 것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즉 이 세상과 이 세상의 것에 주목하여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포기하고 산에 들어가 살거나 세상과 등지고 따로 산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것이 그의 주된 관심의 대상도 아니고 그가 추구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알고 있는데 보이는 것은 잠깐이라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주목하는 것은 잠깐 보이는 것에 있지 않고 영원한 것 즉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영원히 있을 것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자신의 영혼과 그가 영원히 거하게 될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의 몸이 썩지 않을 것으로 부활할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모하고 있다면 그것을 바로 보며 살고 있다면 그는 성령을 따라 살고 있으며 성령의 소욕이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 1문과 그 답변은 이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고 있는 참된 신자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아직도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며, 그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중생을 통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은 이들은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살다가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누군가가 자기의 최고의 관심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순간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며 하나님의 자녀라고 확신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온전히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사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다면 반드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내 삶의 목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더 큰 지식을 소원하게 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더 크게 바라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으로 증명이 되는데 우리 주님이 성령이 오실 것을 약속하셨을 때에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14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는 그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그분에 대하여 이해하며 깨닫도록 합니다.

또한 요한 복음 1426절을 보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왜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부르시는가 하면 그분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 또한 성령이 임재하시며, 내재 하시는 것이 어떤 환상이나 어떤 환각을 체험하는 것으로 또한 방언을 말하는 가로 증명하려고 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사모하며, 알고자 열망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얻고자 애를 쓰고 있는가? 더욱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풍성해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외의 것을 배설물로 여길 정도로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열심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임재나 내재가 은사와 별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은사 즉 성령께서 임의 주시는 은사는 그가 성령의 충만이나 성령의 임재나 내재 자체를 증명해주지 않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충만했던 고린도 교회는 어린 아이 같은 신앙을 보임으로 책망을 받았고, 서로 나뉘며 다투는 교회였습니다. 오히려 넘치는 은사로 문제가 되었던 교회 이며 그들 가운데서는 사단에게 내어 준 자들도 있었습니다. 성령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불신자들을 통하여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영적인 일에 참여하였다고 해서 반드시 그가 중생한 사람이며, 성령이 내재하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알기 원하며, 더욱 확신 안에 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마음은 성령 하나님께서 내재하셔서 일하시는 방식인 것입니다.

넷째로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을 위한 자기의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을 늘 염려하고 걱정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결핍에 대하여 걱정하며, 염려하는 일은 결코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일어날 수 없는 정서인 것입니다. 이들의 사모함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심령이 가난한 상태이기 때문에 더욱 적극적으로 주님을 원하며, 사랑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이러한 마음 가운데서는 자신의 죄로 인한 안타까움과 실망스러움이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허물과 죄를 보며 가슴을 치는 성전을 향하여 감이 얼굴을 들지 못하는 세리의 기도처럼 성령은 그 자신의 허물과 죄의 본질을 보게 하심으로 신자로 하여금 더욱 거룩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열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아버지의 영이시며, 아들의 영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바 된 것은 우리에게 큰 복이며, 우리의 구원의 확신이자, 성화의 완성을 보증하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로 구원의 목적에 따라 살도록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사모하시며, 시기하기 까지 우리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의 모든 소욕이 성령 하나님의 소욕에 맞추어 지도록 부단히 그분께 집중하며,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 우리의 내면을 살피며, 온전하게 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주일 말씀 요약 및 설교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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