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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com/live/NXMrR5gjGk8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시기에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여러 중요하고 우리의 신앙과 믿음에 유익된 말씀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 이 말씀을 함께 살펴보기를 원하는 이유는 이러한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소망 때문입니다. 먼저 오늘 함께 읽은 말씀 가운데 6절 말씀부터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26절을 보면 이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팔리고 있는 참새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시장에서는 상인들에 의해서 식용으로 사용될 참새를 팔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참새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는 이유는 참새를 비유로 해서 다른 말씀을 하시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린다면 그럼 참새 두 마리는 얼마일까? 하는 것입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기 때문에 참새 두 마리는 한 앗사리온 보다 작아야 합니다. 참새 다섯 마리에 두 앗사리온에 팔리기 때문에 한 앗사리온에 참새는 두 마리 반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029절 말씀을 보면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린다고 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다섯 마리에 두 앗사리온이고 마태복음에서는 한 앗사리온에 참새 두 마리입니다. 이렇게 다르게 기록한 이유는 참새의 가격이 중요하지 않으며, 싸고 하찮은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마리가 한 앗사이온이면 두 앗사리온이면 네 마리여야 하지만 하찮은 음식이기에 한 마리를 더하여 덤으로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시장에서 먹거리로 팔리는 참새를 비유로 사용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덤으로 줄 만큼의 하찮은 것에 대하여 입니다. 다시 누가복음 126절을 보면 덤으로 줄 만큼 하찮은 것이라도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즉 너희가 하찮게 여기고 귀하게 여기지 않는 참새 조차도 하나님께서 그 하나도 즉 덤으로 주는 하나도 잊어 버리지 않는 다면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참새에 대한 비유는 하나님 앞에선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이 귀히 여기신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누가 하나님께서 잊어버리지 않은 바 되며 귀히 여기시는 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누구를 가리킴이며, 어떤 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인가 하는 것을 문맥 속에서 살펴보면 누가복음 124-5절을 보면 여기서 내가가 가리키는 인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말하고 있는데 누구에게 말씀하시는가 하면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문맥 속에서 내 친구로 지칭되는 인물은 복수형으로 친구들로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의 핵심 내용을 보면 한 단어가 중요한 힌트를 제공하고 있는데 바로 두려워하다 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4-5절 말씀에서 네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할 자 두려워하라 두려워하라 즉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시는 것은, 또한 그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두려움에 대한 극복과 위로이자 평안입니다.

        이 내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또한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제자들에게 여전히 두려움이라는 것이 늘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며,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첫번째 두려움과 두번째 두려움은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둘 사이에는 본질적 다름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첫번째로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첫번째 두려움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 두려움은 몸을 죽이는 자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몸을 죽이고 라고 합니다. 여기서 죽인다 라고 사용된 단어를 보면 어떠한 방식으로든 죽이는 것입니다. 죽이는 방식이 정하여지지 않은 모든 죽음의 방식이 열려져 있는 죽음입니다.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일반적인 공포는 그 정해지지 않는 방식에 있고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누구도 죽음을 경험하고 말해준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그 후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누구가 생소한 경험일 뿐만 아니라 그 과정이 전혀 알려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떨리며,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에 제자들의 경우에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즉 유대교에 의해서 박해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리스트에 올아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할 이유는 이 죽음은 어떠한 방식이 정해져 있지 않은 죽음이지만 이 죽음의 제한성이 있는데 그것은 몸만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인간 생각하는 일반적인 죽음에 대한 개념은 몸의 생명력을 다하여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 할 때에 죽음이라고 합니다. 의학적으로 아직 살아 있으나 죽었다고 선언 되는 경우들이 있는데 뇌사의 경우입니다. 뇌가 죽은 상태에 있어 비록 의료 기기에 의하여 연명하여 호흡은 붙어 있지만 몸의 기능이 완전히 정지된 상태에 있을 때 그것도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몸이 죽는 다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몸의 죽음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러한 사고와 생각을 교정하십니다. 몸이 그 생명 즉 살아 있음의 기능을 다하여 죽음이라는 선고를 받는 다는 것도 죽음입니다. 그래서 몸을 죽이고 라는 의미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죽임을 행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또한 이들에게 최대치의 가능한 범위는 몸을 죽이는 일 밖에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후에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 큰 놀라움이 제자들에게 알려지고 가르쳐지고 있는데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이라는 말에서 그 후에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몸의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몸의 기능이 상실되고 생명이 떠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후가 있으며, 그 후에 더 무엇인가를 당할 수 있으며, 가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를 가지고 있는 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5절에서 마땅히 두려워 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보이리라는 말은 알리며 나타내며,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몸의 죽음으로 끝이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 가 남아 있습니다. 죽은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를 가지신 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권세를 가지고 있는 분은 앞서 말한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과 구분되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중요한 것이 있는데 몸을 죽일 수 있는 자와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를 가지고 있는 자 사이에 대한 것입니다. 누가 더 큰 권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둘째로는 이 권세가 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더 강력한가 하는 것의 문제입니다. 동일한 점에 대하여 죽이는 것입니다. 죽이다는 단어는 같은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어떠한 방식으로든지의 죽음입니다. 다양한 방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큰 차이가 있는데 인간은 인간의 몸을 다양한 방식으로 죽일 수 있으나 그것이 그가 가진 권세의 한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다양한 방식으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으나 몸의 죽음 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가지지 않은 더 권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지옥에 던져 넣을 수 있는 권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만이 가지고 있는 권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권세는 앞에서 인간이 한 인간에게 줄 수 있는 몸의 죽음의 권세보다 더 무서운 것이며, 더 두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몸의 죽음을 경험한다고 해서 모두다 지옥에 던져 지는 죽음 이후에 일을 경험하지 않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두려운 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오직 하나님께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이 분은 몸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최대한의 공포감과 두려움을 주며 죽이는 자들과 같은 부류로 무자비 하다면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무자비한 분이 아니실 뿐만 아니라 살게 하시는 분이시며, 몸이 죽어도 둘째 사망이라고 여기는 지옥에 던져 넣지 않으실 분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주님께서 두려움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자신의 제자들에게 더 큰 공포를 심어주어 더 두려워하라 공포에 휩싸이라고 말씀하시길 원하셨다면 4절에서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 말의 원어를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지금 너희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표현은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내가 말한다 너희에게 나의 친구 라고 할 때에 나의 친구 너희라는 표현은 자신의 제자들을 사랑하며, 돌보며 보호하시고자 하시는 친밀한 표현이며, 다정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공관 복음서에서 오직 여기서만 나의 친구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또한 보이리라 라는 표현 속에서 너희에게 알려 줄께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5절의 마지막에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 속에서 그래도 두려움의 대상이 바뀔 뿐이지 두려워하는 것은 같이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내가 진실을 말하는 너희는 그를 두려워하라 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두려움은 앞에서 몸을 죽이는 자들에 대한 두려움과 좀 다릅니다. 왜냐하면 다음절인 6절을 첨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 도다 이 말씀에서 참새는 하찮고 값싼 먹거리로 팔리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린바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잊어버린바 라는 단어의 의미를 보면 소홀이 여겨져 버린바 되다 라는 의미로 수동형으로 소홀이 여겨 버려진다 라는 뜻입니다. 즉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 조차도 소홀이 여겨 무관하고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두려움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다음절을 보면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라고 합니다. 참새 한마리도 소홀이 여겨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분의 하찮은 참새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귀한 너희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머리털을 세시는 분은 없습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자신의 머리털이 몇 가닥이고 몇 가닥이 빠졌는지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희의 머리털 즉 너희가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셀 수도 없는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바 될 정도로 너희에게 관심을 가지며, 귀하에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귀하다는 단어는 따로 놓다는 것입니다. 많은 참새보다 더 따로 놓고 귀하게 여기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려워 하지 말라는 말은 몸을 죽이는 자들에 대하여 입니다. 왜냐하면 5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두려워할 자를 보인다고 말씀하시며, 이를 두려워하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7절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분명 몸을 죽이는 자들에 대한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 속에서 우리가 두려움에 대하여 결론을 얻게 되는 것은 이 둘의 두려움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몸을 죽이는 자들에게 대한 두려움은 공포입니다. 절망이요, 소름끼침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두려워할 분에 대한 두려움은 경외심과 공경심입니다. 왜냐하면 이 분은 비록 죽은 후에 지옥에 던질 권세를 유일하게 가지신 분이지만 참새 보다 더욱 귀하게 여기는 분이시기 때문에 누구를 더욱 두려워하며, 경외하며, 순종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서의 일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몸의 일들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땅에 우리의 육신의 일로 말미암아 죽는다 해도 그 후에 우리는 우리를 귀히 여기시는 분과 함께 살았다면 그분에 의해서 결코 지옥에 던져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 뿐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삶이 육체의 삶을 거스르고 힘들게 할 수 있지만 우리의 영혼의 안전을 위하여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분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주일 말씀 요약 및 설교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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