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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com/live/xwHWeY9DvTE



성경에서 듣는 것에 대하여 이러한 경고를 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야고보서 119절을 보면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합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주는 경고로 두 가지는 더디게 하라고 하는데 더디 다는 말은 느리게, 무딘, 소극적인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말하는 것은 소극적으로 말하고 화를 내는 것도 느리고, 소극적이며, 더디게 화를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육체의 기능은 빠르고 많아야 좋을 것이 없고 오히려 죄를 짖게 되는 도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빠르게 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듣는 것입니다. 듣는 것을 속히 하라는 것은 일반적 귀의 기능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귀는 말하는 것의 세배의 속도로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 많은 귀의 기능은 한꺼번에 여러 사람들이 말을 해도 들을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듣기는 속히 하라고 할 때에 이 듣는 다는 것은 바르게 듣고 옳게 듣고 분명하게 듣는 것으로 온전히 말한 것을 이해하는 차원에서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마가복음 423-24절에서 우리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는데 마가복음 4223-24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합니다. 들을 귀라는 표현은 분별력을 가지고, 또한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들음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에게 들으라고 하시며,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고 합니다. 이 말은 주의하여 들으며, 조심하여 들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헤아린다는 단어는 측량한다, 자로 재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말할 때에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그를 측량하거나 자로 재게 되는 행위가 그의 마음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들을 만한 가치가 있고, 중요하며, 이 말이 옳기 때문에 이 말을 따라 살아야 되 라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들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하여 듣지 않고, 조심하여 듣지 않으면 그 말하는 것을 자신의 마음 속에서 잣대와 기준을 가지고 이것은 들을 가지가 없어, 이 말은 내게는 소용 없는 말이야 라고 생각함으로 듣는 바를 버려 버리는 즉 한 귀로 듣고 흘러 버리는 들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받으리라는 말을 통하여 주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너희가 내 말을 들을 때에 즉 주님의 말씀을 듣고 헤아릴 때에 너희 마음이 그 듣는 것을 어떻게 듣느냐 하는 것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만일 나의 말을 귀히 여기고, 가치 있게 듣는 다면 이것을 통하여 너희는 더 많은 것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나의 말을 귀담아 듣고 가치 있고, 귀하게 들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들음에 대한 경고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는 이러한 듣는 것에 실패한 사람의 예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런 들음에 대한 중요성을 잘 나타내는 본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을 책망하는 장면입니다. 본문의 배경을 조금 설명 드리자면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기스였고 그는 야곱의 12번째 아들인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남들 보다 키가 머리 하나 더 있을 정도로 눈에 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왕으로 기름 부음 받아 세워진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으로 하나님께서 백성들 가운데 공포할 때에 부끄러워 짐짝들 사이에 숨어 있을 정도로 수줍음이 많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초심은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됩니다. 그 결정적 사건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당시 선지자였던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 내용은 아말렉이라는 족속을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진멸이라는 것은 하나도 남긴 없이 생명 있는 모든 것을 죽이라는 명령입니다. 이유는 그들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명령을 받고 사울이 군사들을 일으켜 아말렉과 전쟁을 합니다. 전쟁의 결과는 사울의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을 통하여 사울은 승리를 얻었지만 그는 신앙에서 패배하는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상 159절을 보면 그는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진멸하다는 단어의 의미는 봉헌하다 바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진멸과 봉헌과 바침이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 하면 악을 멸하여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사울은 아말렉을 모두 진멸하여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사울이 좋은 것을 진멸하기를 즐겨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즐겨 하지 않았다는 단어의 원어적 의미는 호흡을 맞추기 싫어 했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기를 싫어한 것입니다. 호흡을 맞춘다는 것은 마음을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과 마음을 함께 하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좋은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호흡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뜻을 같이 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는 훈련입니다. 매일 우리의 호흡이 하나님의 호흡이 되도록 맞추어야 합니다. 맞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호흡은 날마다 다르고 때로는 엉뚱하고 잘못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의 호흡에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기를 원하는 사람은 매일 말씀을 봅니다. 사울이 이렇게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기를 거부한 것은 그에게 다른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다 더욱 그가 호흡을 맞추기를 원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이 사울로 하여금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기를 원하지 않게 만들었는가는 삼상 15:19-20절을 보면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무엘이 사울을 책망하면서 하는 말이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의 책망의 핵심은 사울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경청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악하게 여기는 것을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 사울이 동의 하지 않습니다. 사울은 내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했다고 합니다. 자신은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했는데 왜 안 한 것으로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대화의 소통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한 사람은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았다고 하고 한 사람은 했다고 합니다. 사무엘이 왜 청종하지 않았다고 합니까? 그 이유는 아멜렉 왕 아각을 죽이지 않고 사로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양의 가장 좋은 것을 진멸하지 않고 전리품으로 가져 왔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볼때 이것은 명백한 여호와의 목소리 청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는 분명히 여호와 목소리를 청종했다고 합니다. 이유는 모든 것을 진멸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당신의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 가운데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사무엘과 사울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이해는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에 대한 사실입니다. 다른 점은 그 명령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는 사무엘로부터 그렇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듣는 다는 것은 그냥 귀로 듣는 것이 아닙니다. 듣는 다는 것은 많은 기술과 방법을 요구합니다. 부부간이나 부모와 자녀들간의 대화에서 종종 소통이 되지 않고 불통이 되는 이유가 바로 잘못된 들음 때문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해도 그 들은 것에 대한 이해가 다르게 되는 것은 그 듣는 것을 해석하는 자의 마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듣는 것은 들음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듣는 자의 마음과 자세에 따라 다른 이해를 낳게 됩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는 자신 중심으로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뜻이 무엇인지 의도가 무엇인지를 자신 중심으로 들었기에 그는 아각왕을 사로 잡아 왔고 우양의 좋은 것을 남겨 온 것입니다. 본문에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한다는 것은 단순히 목소리를 듣는 것이 아닙니다. 듣는 다는 것의 히브리어는 샤마입니다. 귀를 기울여서 집중하여 마음에 새겨서 듣는 다는 것입니다. 말하는 화자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그 의도가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를 귀를 기울여 집중하여 마음을 다하여 들어야 합니다. 그럴때에야 제대로 듣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에서 들음은 정말 중요합니다. 믿음이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신에게 맞추어서 듣기 때문에 신앙에 문제가 생기고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만 들으려는 습관이 있습니다. 자신이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는 흘려 버리거나 귀를 닫습니다. 귀를 닫는 다는 것은 마음을 닫는 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라 라는 말씀을 원수에게는 절대로 적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적용합니다. 용서하라는 말은 상대방이 들어야 할 말이지 내가 들어야 할 말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을 음식으로 표현한다면 자신이 먹고 싶은 것만 골라 먹는 것을 편식이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원하는 말씀 듣고 싶은 말씀만 듣는 것은 편식입니다. 설교 시간에 말씀이 선포될 때에도 양심에 찔리고 자신이 손해 볼 것 같은 것에 귀를 닫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분은 목사님이 설교시에 죄를 지적하고 잘못된 것만 말하고 책망하면 은혜가 없다고 하고 복 받으라고 잘되라고 설교하면 은혜 받았다고 한답니다. 그분은 분명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귀를 가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을 왜곡시킵니다. 여러분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면 안됩니다.

사울의 들음의 문제에서 중요한 것 한 가지 더는 그가 하나님의 목소리리 청종하는 것 보다 더 듣기를 원하는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백성의 소리였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며 아각을 왜 살려두었는가 그리고 왜 가장 좋은 우양을 남겨두었는가 라는 부분을 생각해 보면 사울의 마음의 귀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이기고 갈멜로 갑니다. 승리한 후에 갈멜로 간 이유는 그곳에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서 입니다. 사무엘상 1512절 입니다. 사울이 유다 산지에 위치한 갈멜에서 자신을 위한 기념비를 세웠다는 것은 그의 생각 속에 이 전쟁의 승리의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높아지고 모든 영광이 자신에게 돌려지기를 원했던 사람입니다. 백성들이 자신을 우러러 보고 자신을 존경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가 가장 좋은 우양을 하나님께 제사 하기 위하여 가져 왔다 하지만 그랬다는 말은 없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정말 하나님께 드리고 싶었다면 그는 진멸함으로 하나님께 드렸을 것입니다. 그가 우양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가져온 것은 핑계입니다. 그의 눈에 그것은 자신의 승리를 위한 전리품입니다.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자신의 승리를 기뻐하게 하며 백성들을 즐겁게 하여 자신을 더욱 따르게 하려는 의도라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듣는 다는 것은 그 마음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들립니다. 백성이 있는 자는 백성의 소리만 들립니다. 불평이 있는 자는 불평만을 듣게 됩니다. 설교가 은혜가 되고 안 되고는 설교자의 준비에도 큰 영향이 있지만 듣는 자의 마음 자세 또한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께 가 있으면 여러분들은 분명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가 있다면 주님이 오셔도 안 듣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그토록 뵙길 원하며 사모하는 주님을 만났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공개적으로도 주님은 여러 차례 그들을 위해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자들처럼 행동하며 예수님을 죽이시기까지 하였습니다. 왜 성경이 들을 귀가 있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는지 아십니까? 결코 제대로 들을 수 없는 귀를 가진 자는 복된 소식 구원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을 버리시고 비우셔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 만을 귀 기울여 집중하여 마음을 다하여 들으려는 노력을 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 것은 23절 말씀처럼 거역하는 것 즉 하나님의 말씀에 반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라고 말한 점치는 것 같은 죄이고 완고한 것 즉 말씀을 거부하는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드라빔이라는 말로 집안의 우상에게 절하는 것으로 우상 숭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은 잘 들음으로 부터 시작합니다.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이런 죄를 범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주일 말씀 요약 및 설교 영상

주일 말씀 컬럼 안에 설교 영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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