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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영상https://youtube.com/live/b2x99iqvj4A


모든 인생이 가장 두려워야 해야 할 평가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 앞에 어떠한 삶을 사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서 571-2절을 보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떠한 삶이 더 나은 삶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당시의 상황을 표현하고 있는데 당시에 의인들이 어떠한 일들을 당하였는지 왜 그들이 그러한 일들을 당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이 판을 치는 시대에 사회적 상황은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전이 있는데 세상 사람들이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은 자들의 죽음에 관심을 기울이는 분이 계심을 말씀하고 있는데 진실한 이들이 거두어 감을 당한다고 합니다. 또한 의인들은 악한 자들 앞에서 불리어가도다 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거두어 감을 당한다와 불리어 간다 라는 표현은 이들은 소집하고 모으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을 소집하시며, 모으시는 것입니다. 비록 악인들의 눈에는 죽는 것으로 삶이 끝이 나는 것으로 보여지고 생각되어지지만 의인 즉 신자의 죽음은 하나님에 의해서 그분에게로 모이게 되는 것이며,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을 부르시는 이유가 그들을 평안에 들어가게 하시며, 편히 쉬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앞으로의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할 수 있으며, 고백하게 되며 확신하게 되는데 시편 11615절을 보면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의 죽음을 모르체 하시거나 또는 아무런 의미 없이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죽음을 보배롭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이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살았던 모든 것을 귀하게 여기시며, 가치 있게 여겨 주시사 그들이 죽을 때에 그들을 보배롭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죽음 가운데 대표적인 죽음이 신약 성경에 나오는 스테반의 죽음입니다. 사도행전 759절을 보면 스테반은 돌로 맞아 죽습니다. 그를 돌로 치던 자들은 그의 죽음이 마땅하며, 그는 불의한 자라고 평가하며, 죽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정 반대였습니다. 오히려 그의 죽음은 보배로운 죽음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죽을 때에 고백했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라는 부르짖음이 응답되는 죽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756절을 보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기 전에 보게 된 것이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 것입니다. 여기서 특별한 것은 바로 우리 주님이 앉아 계시지 않고 서 계신다는 표현입니다. 주님은 스데반을 맞을 준비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죽음의 보배로운 이유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한 사람을 더 보겠습니다. 구약에서 다윗의 부하 장수로서 37명의 용사 중에 한 명인 사람입니다. 이들 37용사들은 다윗과 오랜 동안 전쟁 속에서 결속된 다윗의 사람이자 그의 형제와 같은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야를 다윗은 죽음 가운데 몰아 넣고 비참하게 죽게 합니다. 그 이야기는 삼하 11장부터 시작됩니다. 사무엘하 112-3절을 보면 다윗이 늦게까지 침대에서 뒹굴다가 저녁에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누구인지를 알아 보라고 합니다. 이 여인은 헷 사람 우리의 아내 밧세바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을 하게 됨으로 문제가 발생합니다. 밧세바가 임신을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부하의 아내와 동침한 죄를 덮기 위하여 다윗은 전쟁터에 있는 우리야를 불러들입니다.

삼하 11 6절 이하를 보면 다윗은 우리야를 불러 요압의 안부와 군사의 안부와 싸움이 어떠한가를 묻습니다. 그러나 사실 다윗의 마음 속에는 이런 것에 대한 관심이 있을리가 없습니다. 다윗의 마음 속에는 빨리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하여 우리야를 집으로 들어가게 해서 아내와 동침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엘하 117-8절을 보면 다윗은 왕으로써 전쟁터의 자신의 부하들을 아끼는 척하며 우리야에게 집으로 들어가 발을 씻으라 라고 말합니다. 발을 씻으라는 표현은 푹 쉬라는 히브리어의 관용적 표현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식물을 보내었다고 합니다. 이 단어를 공동번역에서는 왕이 하사하는 술상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일리가 있는 번역입니다. 의도는 우리야가 포만감과 편안함을 제공함으로 아내와 동침하여 자신의 죄가 가리워지기를 바람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우리야가 집으로 가지 않고 왕궁 문에서 다윗의 부하들과 더불어 잤다고 합니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9절을 보면 이 말을 좀더 설명하자면 자신의 주인인 다윗의 모든 종들과 함께 잠을 잤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냥 왕궁 문에서 우리아가 잤다고 하지 않습니다. 의도를 가지고 의미를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여전의 그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주인의 종들과 함께 잠을 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야의 마음입니다. 그가 다윗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가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하는 우리야의 다윗을 향한 마음과 자세입니다.

        다윗이 우리야가 왕궁 문 앞에서 잠을 잤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불러 묻습니다. 사실 그의 마음은 따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네가 길을 갔다 왔는데 왜 집에 들어가서 자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우리야가 대답합니다. 사무엘하 1111절을 보면 우리아가 다윗에게 고하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 가운데 유하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신복들이 바깥 들에 유진하였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치 아니하기로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핵심은 법궤 이스라엘 유다가 모두 바깥 텐트에 있고 자신의 상관 동료들이 바깥 들판에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자리이까? 나를 위해서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만 즐거울 수 없고 나만 행복하거나 나만 기쁨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야는 그냥 평범한 군인이 아닙니다. 중성 되고 의리가 있는 군인이며 신의가 있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그를 취하게도 하지만 그는 여전히 집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다윗은 편지 한 장의 그의 손에 들려 전쟁터로 돌려 보냅니다. 그 편지는 장군 요압에게 그를 전쟁을 가장하여 죽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요압은 랍바성 전투에서 가장 강력한 수비군들이 있는 곳을 공격하는 척하며 우리야를 앞세워 죽게 합니다.

        이렇게 우리야는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죽임을 당한 우리야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우리야를 통하여 배우는 것이 그러니까 사람은 적당히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입니까? 너무 정직하거나 너무 잘난 척 하면 안되다는 것입니까? 사람이 좀 융통성이 있어서 눈치껏 살아야지 라는 것입니까? 오늘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그는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내의 배신과 또한 자신이 충성을 다 바쳤고 그를 위해서라면 죽는 것도 아깝지 않게 살아 왔지만 현실은 참혹은 배신으로 얼룩지고 그렇게 죽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우리야를 통하여 깨달아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야의 인생은 배신으로 실패한 인생입니까?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그냥 사라져버린 인생이고 가치 없는 인생입니까?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이 족보를 보면 대개 남자들만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남자들이 나오는데 갑자기 여자들이 등장합니다. 5명의 여자들이 등장하는데 모두 특별한 경우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6절을 보면 그 여자 중에서 이름이 없고 누구의 아내로 등장하는 것이 밧세바입니다. 그의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야의 아내로 등장을 합니다. 문제는 밧세바는 우리야가 죽은 후에 다윗의 아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태는 다윗이 솔로몬을 낳고 라고 하지 않고 그것도 다윗이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라고 하지 않고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의도된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허물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이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런 죄인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구원하시겠다는 그분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이런 약한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신다는 의미도 됩니다.

        그럼에도 또 다른 한가지는 밧세바는 다윗의 아내가 아니라 충직한 우리야의 아내이며 우리야의 인생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이름이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스런 자라는 것입니다. 6절의 원문을 보면 밧세바를 우리야의 그녀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비록 세상적 가치관으로 충성과 헌신의 결과가 배신과 속임이었지만 그의 충성과 헌신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인생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야는 그를 아는 사람들에 의해서 잊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기억하신 사람이며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왜 중요합니까? 오늘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변질의 중심에 있는 것이 성공 주의 신학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예화집에서 본 내용입니다. 소년은 몹시 가난했으나 십일조를 빼먹은 적이 없었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습니다. 소년은 성실과 믿음이 인생의 성공을 가져온다고 믿고 가난과 싸웠습니다. 그 결과 30세에 모빌런치서비스라는 회사를 설립하게 되었고 이어서 세계적인 도넛 상표를 개발했습니다. 그가 바로 던킨도너츠의 창업주인 로젠 버그입니다. 그는 72세를 맞이하는 생일 축하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늘 제 짐을 맡아 주셨습니다. 성공은 지식에 있지 않고 태도에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인생의 성공이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태도에 있음을 고백한 말입니다. 이 글에서 결말은 순종이 인생의 성공의 열쇠라고 합니다. 이 글이 문제가 됩니까? 어떤 이에게는 안됩니다. 그런데 제게는 됩니다. 왜냐하면 이 글이 말하는 인생의 성공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로젠 버그는 성실과 믿음이 인생의 성공을 가져온다고 믿고 가난과 싸웠다고 합니다. 잘 생각하십시오. 무엇과 싸웠습니까? 불신앙과 싸웠습니까? 악과 싸웠습니까? 죄와 싸웠습니까? 가난입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성실과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것입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인생의 성공은 세상에서 잘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생의 성공을 하나님이 보배롭게 여기시는 것이며, 그의 죽음을 가치 있는 것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바로 성공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부르심을 자리는 각기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를 삶을 평가하시는 분은 같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지막 날에 우리의 인생을 유일한 평가자 이시자 모든 마음의 생각과 행동을 달아 보시는 이가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사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평범할 수 있고, 남들에게 인정받거나 또는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것도 내세울 만한 것도 없는 보잘 것 없고 초라해 보이는 일이라도 그 일 가운데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며, 그분의 말씀에 따라 경건과 거룩함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임을 알고 살아내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은 각자의 인생을 동일한 절대적 가치를 두고 평가하시지 않고 상대적 평가를 가지고 평가하십니다. 적게 주신 자들에게는 적게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자들에게는 많이 요구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은 일을 맡아 수고하며 살았다고 비관하거나 낙심하지 마십니다. 내게 맡겨주신 것을 감사하며, 그 일에서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일 말씀 요약 및 설교 영상

주일 말씀 컬럼 안에 설교 영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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