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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com/live/r5oLqKf25KU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예레미야서 2336절의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 앞에 주어진 경고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곡해하고 변질시키는 일들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레미야서 2336절 말씀을 보면 우선 이 말씀에서 첫째로 다시는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의 의미를 알아야 하는데 엄중한 이라는 말은 짐스러운 이라는 뜻입니다. 즉 다시는 여호와의 말씀이 짐스럽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남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짐스럽다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평과 불만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내 말을 짐스럽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시며, 각 사람의 말이 자기에게 중벌이 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중벌이라는 의미는 짐스럽게 만들겠다는 의미로 앞에서 엄중한 즉 짐스럽다 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 의미는 감당할 수 없는 짐이다 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말씀을 감당할 수 없는 짐이라고 여기는 자는 그들이 말이 자기에게 감당할 수 없는 짐이 되게 하실 것이라는 뜻이므로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심판을 당하게 될 것임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오늘 중요하게 여겨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왜곡하는 자들에 대하여 인데 다음의 내용을 보면 이는 너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망령되이 사용함이니라 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망령되이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의 거짓 선지자들이 행하였던 범죄로 살아계신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망령되이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망령되이 라는 말은 본래 의도한 것과 정 반대로 뒤집어 사용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말씀의 뜻에 대한 왜곡이자 곡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변질과 왜곡은 당시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시의 율법학자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율법에 능통하다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책망하시며, 심판을 경고하시는 것을 보게 되는데 마태복음 15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친다고 합니다. 이것들이 왜 문제인가 하는 것은 이들이 단지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깨달은 세상적 교훈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방식과 행위 즉 자신들이 만들어낸 계명을 가지고 교훈을 삼아 사람들을 가르치며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나님을 높이며, 경배하는 일이라 라고 가르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분별력에 대하여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말씀이 있는데 요한복음 717-18절을 보면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할 때에 우리가 그 사람의 가르침에서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아니면 그 자신이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있는 것은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이는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명확한 구분은 자기 영광 즉 개인의 영광, 사람의 영광, 사람의 잘됨, 사람이 평안을 위한 말씀인가 아니면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높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의 중심에 사람을 위하며, 사람이 중심이 되고, 사람을 편하게 하고, 사람에게 유익 되고, 사람의 잘됨으로 나아가 결국 사람의 영광이 되게 하기 위한 말은 스스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문제이건, 어떠한 환경이건, 어떠한 상황이건 하나님을 향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는 자의 말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실제적으로 어떤 것이 거짓된 말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망령되게 사용하는지를 몇 가지 실례를 통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잠언 2918절을 보면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고 합니다. 방자히 라는 말은 풀어 놓다, 그대로 내버려 두다 라는 뜻으로 훈련이 되지 않은 짐승을 풀어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마음 대로 무질서하고, 본능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이 없으면 그렇습니까? 묵시가 없으면 그렇다고 합니다. 여기서 묵시를 KJV에서는 vision이라는 단어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비전이 없는 사람, 즉 목표가 없고, 꿈이 없는 사람은 멋대로 살며, 목표 없이 본능에 이끌려 살다가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비전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청년들에게 이 본문을 가지고 비전을 품으라고 합니다.

        이 비전을 품은 성경의 인물들을 예로 들기까지 합니다. 요셉은 꿈을 꾸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비전의 사람이었으며, 그는 그 비전을 목표로 참고, 인내하며, 순종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원대한 꿈을 꾸고 비전을 가지고 그 비전을 위해 희생하며, 끝까지 비전을 위하여 살라고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가지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가 성경을 가지고 말하면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신의 마음대로 망령되이 사용하고 있기에 책망하며, 경고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교훈을 주의하라는 것도 그럴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이 정말 자신이 잘되기 위대한 꿈을 꾸고 비전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인데 거짓말입니다.

        그들의 주장의 전제가 되는 이 말씀의 해석부터 망령된 것입니다. 여기서 묵시라는 말은 계시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킹제임스 버전에서는 vision이라고 번역하였는가 하는 것은 이 단어가 하존이라는 단어인데 뜻은 보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즉 보는 것이 없으면 백성이 방자하게 행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는 것이 없으면 그렇습니까? 다음에 나오는 내용이 대조를 이루는데 방자히 행하는 것은 복이 있는 것의 대조입니다. 그렇다면 보는 것이 없는 것과 대조를 이루는 것은 보는 것인데 무엇을 봅니까? 율법을 보는 것입니다. 즉 묵시라는 말은 율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이나 비전으로 해석하여 청년들을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꿈과 욕망과 야망을 이루는데 도구로 삼게 하는 가르침 과연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요셉이 꿈을 꾼 것이 그가 비전을 가지고 야망을 가진 것이 아니라 꿈이 꾸어진 것입니다. 요셉은 그 길을 피하고 싶은 자였습니다. 그래서 기회만 되면 도망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시편 10517-19절을 보면 그의 몸이 쇠사슬에 매였다고 번역이 되었는데 몸이라는 단어는 영혼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즉 요셉은 그가 꿈을 위하여 종으로 간 것이 아니라 팔린 것이며, 그의 발과 그의 영혼이 쇠사슬에 매인 것은 그가 자신을 단련하기 위하여 경험을 쌓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신 것이며, 하나님이 그를 앞서 보내사 하나님을 뜻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요셉의 삶의 주체는 요셉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꿈을 꾸고 실천하자는 말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인본주의 신앙이며, 인본주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시편 1103절을 보면 한 때 이 구절은 찬양으로 청년들을 흥분시키고, 헌신을 이끌어 냈던 구절입니다. 이 말씀에서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온다고 합니다.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은 도대체 어떤 청년입니까? 사람들은 새벽 이슬에 대하여 말합니다. 오염되지 않는 것이 새벽 이슬이라는 것입니다. 깨끗한 것이 새벽 이슬이며, 맑고 영롱한 것이 새벽 이슬이고, 순수한 것이 새벽 이슬 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들은 이러한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주의 권능의 날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 날은 헌신하고 봉사하는 날이 아닙니다. 이 날은 주님이 오시는 날이며, 세상이 끝이 나는 종말의 날이며,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헌신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하는 것인데 이 말은 자발적으로, 또는 자원하여 라는 뜻입니다. 즉 그 날에 주의 백성들이 거룩한 옷을 입고 라고 하는데 거룩한 광채 안에서 라는 뜻으로 주님이 오시는 그날에 주의 백성 전체가 거룩한 광채 안에서 즐겁게 자원하여 주님께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한글 성경이 새벽 이슬 같은 이라고 하여 주의 청년들이 새벽 이슬 같다고 이해하는데 새벽 이슬 같이, 원문의 뜻은 아침의 태로부터 이슬 같이 주님께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주님은 주님의 젊은 자들인 것입니다. 즉 주의 백성들이 거룩한 광채 가운데서 즐거이 자원하여 주님께 나오는 종말의 날에 이들은 주님께 젊은 자들로 힘있고, 활력을 가지고 주께 나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청년들이 새벽 이슬이 아니라 종말의 날에 모든 주의 백성들이 새벽 이슬이 아침에 온 지면에 내리듯이 가득 주님께 나오며, 새벽 이슬이 비가 자주 내리지 않는 이스라엘 지형에 하나님의 복으로 표현되듯이 복되게 주님 앞에 나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잠언 2721절을 보면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들을 단련한다고 합니다. 이 말이 어떻게 가르쳐지고 사람들에게 교훈되는가 하면 칭찬은 사람을 단련하는 도구이기 때문에 칭찬하라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베스트 셀러였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가르침은 칭찬은 사람을 변하게 하며, 칭찬은 사람에게 꿈을 주며, 용기를 주며, 사람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소극적인 사람이 칭찬으로 적극적인 사람이 되고 아들을 칭찬으로 키우면 아이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을 가진 위대한 사람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칭찬이 사람을 단련하기 때문에 칭찬하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이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목사가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자세히 살펴봅시다. 성령의 가르침과 문해력을 가지고 이 말씀을 생각해 보면 단련하는 도구들이 나옵니다. 도가니, 풀무 등입니다. 이것들의 목적은 단련입니다. 단련한다는 뜻을 생각해 봅시다. 은을 단련 하는 것과 금을 단련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어떻게 단련합니까? 단련이라는 뜻은 여기서 단련은 몸이 아닙니다. 단련은 쇠와 자주 함께 사용되는데 불에 달구어 두드려 단단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은을 불에 달구어 두드려 단단하게 합니까? 금을 그렇게 합니까? 은과 금은 불에 달구어 두드려 단단하게 만드는 금속류가 아닙니다. 은과 쇠가 불 속에 넣는 이유는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함이며, 은과 금의 순도를 높이기 위함이거나 또는 알아 보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어 성경에서는 시험하다 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칭찬은 사람을 단련한다는 것은 알아 보기 위한 시험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문에서 단련하다는 단어를 입증하며, 증명하다 라는 뜻의 단어가 사용된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은 칭찬을 해 보아야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누군가 칭찬을 받게 되면 그때에 그 사람의 속에 있는 숨겨진 본성이 들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자신이 자신을 칭찬하건, 또는 타인이 그를 칭찬하건 그때 그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교만한 사람인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사람인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인지 그때에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로 서로 칭찬으로 서로 격려 합시다. 서로 칭찬함으로 서로를 좋게 하며, 유익을 줍시다 라는 의미에서 칭찬하라고 하는 것은 시험에 빠지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을 교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과 반대의 가르침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성경은 칭찬 받을 때에 조심하라고 합니다. 칭찬을 받으려 하지 말라고 합니다. 오직 칭찬은 주님께 받기를 바라는 것이 참된 신자인 것입니다. 타인의 칭찬에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가르침으로 진리를 어둡게 하며, 사람들에게 세상적인 생각들로 마치 성경인가 가르쳐 사람들로 하여금 사람의 교훈을 따르게 하는 일들이 안타까운 현실인 것입니다. 이들은 사람을 위하여 사람의 교훈을 내고 사람을 가르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면 결코 이런 말씀을 그렇게 해석하여 가르치며, 서로 칭찬해 줍시다. 나는 이제부터 칭찬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더욱 지옥 백성이 되게 하는 자와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가지고 그렇게 사람의 교훈으로 변질시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려운 때를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는 것을 조심하시고 듣는 것을 조심하십니다. 무엇을 듣든지 그것이 하나님께로 온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나를, 사람을 높이는가, 그들에게 유익이고, 즐겁게 하고 만족을 주는 것인가 목적이 사람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을 향하게 하며, 하나님을 추구하게 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 것에 집중하지 않게 하며, 이 세상의 것을 쫓게 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게 합니다. 그의 나라를 더욱 사모하게 합니다. 부디 어려운 때에 하나님의 바른 말씀에 붙잡히 있기를 구합니다.

 

 

 

 

 

 


주일 말씀 요약 및 설교 영상

주일 말씀 컬럼 안에 설교 영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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